[화촌일기] 초면에 결혼했던 그 시절 신랑신부

  • 글·사진 이남석 자전거 여행가
    입력 2020.10.20 09:47

    화촌 노인들의 옛날 결혼 이야기와 귀농 2년차 농사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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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십 넘은 농부가 혼자 농약을 뿌리는데 호스가 엉켜 있어 도와주었다.
    긴 장마가 지나자 숲은 더 깊어지고 신비로워졌다. 꾸준히 내린 비로 땅속 깊은 곳까지 습기를 보존한 덕분에 때를 기다리던 온갖 버섯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며칠 전 도광터로 돌아오는 임도를 자전거로 달리다 보니 활엽수 밑에 말굽버섯과 따귀버섯이 올라와 있었다.
    새로 뻗은 나뭇가지들은 껍질에 강인한 심줄을 더해 사나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꽃을 떨어뜨리고 과육을 부풀렸던 수종들은 빛을 모아 알맹이를 익히기에 바쁘다. 낙엽과 이끼로 희미하던 계곡은 폭우로 불어난 물에 갈리고 닦여, 바닥에 누웠던 돌들이 제 빛깔을 찾았다. 맑은 물이 좔좔 흐른다. 그 많던 가재들은 어디에 있을까? 혹 급류에 떠내려가지는 않았을까 염려되는데, 물이 줄어들고 가을이 되면 다시 도랑 틈바구니로 모여드니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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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의 산촌 마을인 신봉리 모습.
    골짜기마다 벼 잎이 억세지고 알이 배면서 벌써 누런빛이 보인다.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산간지역 다랑구지(계단식 논)에는 올벼를 심는데, 음력 8월 초가 되면 왕성하게 자란 벼가 굵어지다가 어느 날 이삭을 내고 꽃을 피운다. 일찍 서리가 내리기 때문에 늦게 심고 빨리 수확할 수 있는 벼를 심어 추석 전에 벤다. 
    강냉이 수확이 끝나면 밭에는 콩이나 고구마, 깨나 메밀 같은 작물이 여물어간다. 봄과 여름에는 농사일로 바쁘다가 가을이 되면 들에서 자라던 곡식이 여물어 집 안으로 들어오니 혼기가 찬 여자며 남자들은 이 계절에 혼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먹을 것으로 집이 넉넉해지니, 덩달아 마음까지 집안 대소사로 옮겨졌다.
    어렸을 적 삼촌이나 형, 누이들이 혼인하는 과정을 보면 오늘날과는 달랐다. 필자가 잘 아는 형님은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 안 있다가 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형님 평소에는 누가 우스갯소리를 해도 입이 곱자로 굽어지는 걸 못 봤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눈썹까지 초승달처럼 휘어지느냐?”라고 물었다. 형님은 안쪽 봉창에서 조심스럽게 뭔가를 꺼냈다.
    “이 사진 보고 얘기 좀 해봐라. 예쁘냐?”
    흑백사진 속에는 반듯한 파마머리에 적삼을 받쳐 입은 어떤 여인이 있었다. 얼마나 손으로 만지고 봤는지 손때로 사진이 반들반들했다. 아직 초등학생이던 내가 어떻게 사진만 보고 여인의 아름다움을 가늠할 수 있었겠는가. 한 달 이후 그 형님댁에 차일이 쳐지고 부엌에서 연기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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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촌면 성산마을의 민가. 채마밭과 화단, 바지랑대와 뒤란의 살구나무가 전형적인 시골 민가 모습이다.
    다음날 마당에 차려진 초례청에서 형님은 바로 그 사진 속 여인과 혼인했다. 족두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신부를 보려고 사람들 틈을 비집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마을 잔칫집에 가면 누구라도 음식을 대접받을 수 있었는데, 뜨끈한 국물에 말은 국수가 전부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단출한 상차림이지만, 그 시절엔 잔치가 있어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이런 우리네 풍습으로 인해 지금도 ‘국수 언제 줄 거냐’는 말이 ‘결혼은 언제 할 거냐’를 묻는 말이 되었는데 다 이런 연유인 것 같다. 
    저녁에는 마을 여인들이 신부를 지킨다면서 신방 앞에 앉아 있다가는 장난기가 있는 사람들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내기도 했다. 요즈음처럼 남녀가 자유롭게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 어울려 단체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던 산골에서는 혼기가 찬 자식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이야말로 큰일 중의 큰일이었다. 그러니 혼인의 예는 상례喪禮와 더불어 집안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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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촌면 좌운리의 들판. 벼가 영글어가고 있다.
    보통 중신애비, 중매쟁이, 또는 매파라고 해서 혼인할 상대자를 연결해 주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근동(이웃동네)의 큰 장이 서는 날이면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혼담을 얘기하기 쉬웠다. 
    남녀가 결혼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지금처럼 서로 만나 선을 볼 수도 없으니, 사진 한 장  주고받는 것으로 만남을 대신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혼 전에 눈 한 번 맞추지 못하고, 심지어 얼굴조차 사진으로만 보고, 서로 다른 성씨가 만나 뜻을 맞추고 자식 낳아 평생을 사는 것이 어찌 쉬웠겠는가.
    일전에 자전거를 타고 가래골에 들른 적이 있었다. 대학산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가 늘목재를 넘기 전에 있는 산기슭 마을이다. 예전에는 깊은 골짜기에 화전민까지 보태 주민수가 꽤 많았다. 하지만 이젠 토박이는 두 집밖에 없고, 다른 집은 모두 도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터전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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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래골의 민가. 지은지 100년 넘은 집과 대추나무. 요즘 농촌에서도 100년 넘은 집은 흔치 않다.
    “그때야 어른들이 가라고 하면 갔죠.”
    “그럼 선은 보셨나요?”
    “선은 무슨 선. 초례청에서 처음 봤지. 그땐 신랑 집이 땅 많고 배부르게 먹고 살 만하다고 하면 다 됐어요.”
    소나무를 찍어 넘겨 짜 맞춘 집은 산골에서 보기 드물었다. 대청까지 있는 잘 지은 집이었다. 시아버지가 젊을 때 심어 100년이 넘었다는 마당 앞 대추나무가 이제는 집의 터주신이 되어버렸다. 팔십을 훌쩍 넘긴 안주인은 60대에 바깥양반과 사별하고 홀로 삼남매를 키운 얘기를 하며, 사랑채를 가리켰다. 자식들이 공부할 수 있는 방을 따로 만들어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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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래골 민가의 사랑방. 자식 삼남매 공부방으로 썼다고 한다. 출입문이 질박하다.
    밭 농사로 수익 내기 쉽지 않아 

    홍천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노천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팔십 넘은 농부가 농약을 뿌리는 중이었으나, 농약 호스가 벼 포기에 엉켜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자전거에서 내려 도와줬다. 덕분에 집에 초대를 받아 커피 한 잔과 이런저런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혼자하기 힘든 일인데.”
    “집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줄을 잡아 줘서 쉬웠는데, 이제는 혼자 하려니 어려워.”
    안주인이 살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저세상으로 가고 나니 뒷밭에 채소를 돌보는 일부터 농약 호스를 잡아 주는 일까지, 빈자리가 너무 힘들고 허전하다고 했다. 간혹 질곡의 삶을 살다 간 여인들의 얘기를 후대에 교훈으로 보여 주려 열부각이나 열녀각이 있는 마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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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추 심을 땅을 고르고 김장배추를 심었다.
    여기저기 화촌 주변을 다니다 보면 귀촌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널찍한 땅을 골라 현대식으로 주택을 여러 채 지어 분양하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은 새로 마을 하나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골짜기나 양지바른 묵정밭에 새집이 들어서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 
    시골에 처음 땅을 사서 큰 집을 짓고 들어오면, 복잡한 세상살이로부터 빠져나왔다는 생각에 홀가분하다. 귀촌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꺼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단 300평의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려도, 들어가는 노동력은 상상 이상이다. 제초는 물론이고 농약도 줘야 한다. 그뿐인가. 작물이 허약하면 거름이나 비료도 주며 북돋아야 한다. 더구나 경작하는 평수가 늘어날수록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 너무 많다. 
    시도 때도 없이 예초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은 예사다. 그렇다 보니 경작하고 관리하는 범위가 점점 줄어들고 나중에는 집 주변도 제대로 건사하는 것이 힘들고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집은 농촌에 있지만, 실제 생활은 도시와 농촌을 왔다 갔다 하면서 두 집 살림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왔던 사람들이 농사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아는 데는 2년이면 족하다.
    그제는 태풍으로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배추밭에 배수로를 냈다. 비가 그치고 난 뒤에는 배추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농약을 뿌렸다. 친환경 농약이라고 해서 사왔는데 그 효과는 아직 알 수 없다. 집사람이 올해 김장은 최소한 100포기 이상을 한다고 해서 배추도 많이 심었다. 
    고추밭에 가보니 농약을 주지 않고 키워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의 허망함을 보여 주는 결과가 여기저기 나타났다. 탄저병으로 떨어지는 고추는 물론이고, 잡초를 모두 제거했는데도 어디서 달려들었는지 해충이 익은 고추만을 공격해 성한 고추가 드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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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봉리 가래골의 100년 넘은 민가 주인. 팔십 넘은 고령에도 옛집을 홀로 지키고 있다.
    태풍이 하나 지나갔는데 또 하나가 올라온다고 하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올해는 예전만큼 예민하지 않다.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뒷산에는 오미자가 붉게 익어가고 다래도 이미 낙과가 시작되었다. 임도 입구에는 벌써 버섯을 따려는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가는 걸 볼 수 있다. 높아진 구름 사이로 햇빛은 창날 같고, 뚝버들(버드나무)에 기대 우는 매미도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태풍이 지나가면 바구니를 들고 산에 가봐야 할 것 같다.
    도랑물로 설거지를 하고 오는데 청솔모 한 마리가 아직 설익은 열매를 매단 잣나무와 가래나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가래를 따다가 나를 보자 물고 있던 가래를 땅으로 던지더니 쏜살같이 달아났다. 
    둥지를 떠난 어린 새들이 아직도 어미에게 먹이를 요구하지만, 어미는 냉정하게 뿌리친다. 다 자라지 않은 날개를 부딪치며 음을 조율하는 여치나 귀뚜라미의 노래가 머리맡으로 들리니 저만치 가을이 왔다는 증거이다. 
    일전에 서석과 좌운에 가서 밭을 알아봤다. 내년에는 밭을 빌려서 콩 농사와 고추 농사를 지어볼까 생각하고 임대가격을 알아보니 평당 1,000원에서 많게는 2,000원 정도였다. 2,000원인 경우는 인삼 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내는 가격이니 1,000원 정도면 된다고 보고 1,000평이면 100만 원이다. 솔직하게 말해 1,000평을 임대해서 200만 원 이상의 소출을 내야 한다고 볼 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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