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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흰소의 해' 특집 소백산 르포] 매운 북서풍 맞으며 무결점 일출을 맛보다

글 서현우 기자 사진 김종연 기자
  • 입력 2021.01.06 09:42
  • 수정 2021.01.0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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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소의 해' 소백산 특집
제2연화봉~비로봉~어의곡 12km

달콤하고 낭만적인 소백산 일출을 맞는 손영호씨와 강주희씨.
달콤하고 낭만적인 소백산 일출을 맞는 손영호씨와 강주희씨.

뭉근한 화롯불이 필요했다. 거창하지 않아도 한켠의 어둠만 걷어내면 족했다. 마음속 소박한 기대는 덜컹거리는 기차 칸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점차 욕심으로 변해갔다. 환상적인 겨울 상고대와 훤칠한 일출까지 모두 두 눈에 담고 싶어졌다.

과욕이었다. 한참을 달려가 만난 소백은 산에서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듯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선사해 주며 나를 꾸짖었다. 상고대가 피기에는 습도가 낮고 날씨가 쾌청했다. 상고대는 기온이 낮고 습도가 높은 날 잘 만들어진다. 보통 영하 6℃ 이하, 습도 90% 정도에 풍속이 초속 3m 이상일 때 피어난다. 기온, 일교차, 풍속 등 모든 조건이 맞아 떨어졌지만 습도가 20% 정도 모자랐다.

대신 소백은 대피소에서 한동안 근무했던 국립공원공단 직원도 연중 몇 번 본 적이 없다는 깨끗한 일출을 내줬다. 떠오르는 태양이 마침내 뺨을 완연히 붉게 물들이자 대지에 깃들어 있던 어둠은 몽땅 사라졌다. 시원한 북서풍을 한껏 폐에 담아본다. 편히 숨쉬기조차 두려운 지상 세계에선 누릴 수 없는 호사, 일출산행의 즐거움이다.

소백산 주능선에 만개한 상고대. 사진 소백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정지민 주임.
소백산 주능선에 만개한 상고대. 사진 소백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정지민 주임.

하늘에서 내려온 초보 등산커플

둘 다 2020년 봄부터 산행을 시작해 겨울 산행이 처음이라는 스튜어드 손영호씨와 스튜어디스 강주희씨 커플과 함께 소백산小白山(1,439.5m)을 찾았다. 소백산 주능선은 소의 등걸을 닮아 편안하고 부드러워 초보 등산객들의 겨울 산행 입문 코스로 널리 각광받고 있다. 손씨는 “2020년 여름에 소백산을 처음 왔었는데 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라 그저 앞만 보고 갔었다”며 “당시에는 안개도 많아서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오늘 소백의 진수를 제대로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 커플은 이른바 ‘산내커플’이다. 가을 민둥산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강씨는 “한 달에 여덟 번은 같이 산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MZ세대의 등산 열풍이 만들어 낸 새로운 데이트 풍조다.

초보 산객에게 장거리 일출산행은 위험할 수도 있어 국립공원공단의 협조를 받았다. 소백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정지민 주임의 인도를 따라 제2연화봉에서 새벽에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제2연화봉대피소는 운영이 중지된 상태다.

제1연화봉에서 돌아본 소백산 주능선. 연화봉에 들어선 소백산천문대(사진 중앙)와 그 너머 제2연화봉대피소가 눈에 들어온다.
제1연화봉에서 돌아본 소백산 주능선. 연화봉에 들어선 소백산천문대(사진 중앙)와 그 너머 제2연화봉대피소가 눈에 들어온다.

짙은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을 켜고 길을 나선다. 아직 새벽의 여명조차 없는 상황. 습기 가득한 안경에 별빛은 요원하고 마치 활주로처럼 뻗은 남동쪽 풍기읍내의 화려한 불빛이 안개 너머로 번뜩이는 것이 보인다.

“벌써 눈이 쌓여 있네요?”

어두워서 보이진 않지만 등산화 바닥에 팥빙수 얼음처럼 고운 눈이 사분사분 밟힌다. 취재 당일에는 아직 지상에 첫눈 소식이 없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다목적 위치 표지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지민 주임. 위치번호를 외워 두면 위급상황 때 큰 도움이 된다.
다목적 위치 표지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정지민 주임. 위치번호를 외워 두면 위급상황 때 큰 도움이 된다.

정지민 주임은 “이 시기에 주능선에 쌓인 눈은 직접 내려 쌓인 것보다 북서풍이 골짜기에서부터 그러모아 밀어 올라온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천체관측소가 있는 연화봉까지는 임도를 따르는 길, 시시각각 붉게 물들어가는 동쪽 지평선을 보며 행여나 일출을 놓칠까 속도를 더한다. 연화봉 해맞이전망대에 오르자 매서운 북서풍이 몸을 때린다. 큼직한 표지석 뒤에 숨어 발을 동동 구르며 일출을 맞는다. 한 줌의 구름도 없이 맑게 떠올라 온 세상천하가 한눈에 밝아온다.

환상적인 일출을 맞이한 후에 즉각 제 모습을 드러낸 주능선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아쉽게도 명성이 자자한 소백산 상고대는 자취를 감췄다. 소백의 상고대가 유난히 뛰어난 것은 지형적인 특징에서 비롯된다. 남쪽으로 뻗어가던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서진하며 처음으로 높게 일어선 산이 소백산이다. 이처럼 남서 방향으로 길게 능선이 뻗어 있기 때문에 능선을 거침없이 넘는 겨울철 북서풍이 화려한 상고대를 피워 낸다. 상고대가 필 때면 산의 북서면부터 정갈하게 나이 먹은 노신사처럼 하얗게 물들어간다.

소백산 주목군락과 구상나무. 기후변화로 고통 받는 와중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소백산 주목군락과 구상나무. 기후변화로 고통 받는 와중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상고대가 필 만도 했는데 아쉽네요. 그래도 오늘 전망은 ‘역대급’인데요? 저기 태백의 풍력발전단지까지도 보여요.”

정지민 주임의 손끝을 따라 기나긴 백두대간의 눈으로 헤아린 끝 저 멀리에 꽂힌 작은 바람개비들이 보인다. 연화봉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전망대다. 남쪽으로는 도솔봉과 묘적봉이 웅장하게 솟구쳐 있다. 능선 서쪽으로는 거친 붓글씨의 끝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월악산 상봉과 제천과 영월의 산봉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남서쪽 멀리에는 운해에 잠긴 채 다른 봉우리들에 비해 한참 높은 고고한 한 봉우리가 유달리 시선을 잡는다. 덕유일까, 지리일까 정 주임과 한참 지도를 보며 토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잔설산행’을 만끽하고 있는 강주희씨.
‘잔설산행’을 만끽하고 있는 강주희씨.

겨울 산행 안전의 핵심! 보온과 위치 확인!

봉우리 하나하나 이름 찾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가 걸음을 옮긴다. 능선에서 왼쪽으로 살짝 빠지는 길에는 겨울이 한 가득 찾아와 있다. 연화봉 능선의 첫 손님인 탓에 발자국 하나 없는 반듯한 눈길을 즐길 수 있었다.

“아깝다. 비로봉 당일 초등은 뺏겼네요.”

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산짐승의 앙증맞은 발자국이 비로봉을 향해 점점이 이어져 있다. 정 주임은 “대피소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바로 이 지점에서 멧돼지와 마주친 적이 있다”며 “멧돼지와 마주치면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등을 보이지 않고, 천천히 뒷걸음질로 도망가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내친김에 초보 등산객을 위한 겨울 산행 팁도 청해 보았다.

비로봉을 향해 오늘 산행의 마지막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비로봉을 향해 오늘 산행의 마지막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알려드리면 잊어버릴 테니 가장 핵심인 딱 두 가지만 기억하시면 될 것 같아요. 첫 번째는 보온입니다. 장갑이나 발라클라바(목출모) 등 체온 유지를 위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장비를 준비하고, 산행 중에 자주 입었다 벗었다 해주시는 게 좋아요.

두 번째는 위치 확인입니다. 겨울에는 휴대폰 배터리가 쉽게 방전되는 경우가 있어 GP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러 있는데요, 탐방로 상에서 자주 보는 다목적 위치 표지판의 현 위치번호를 외워 두시면 위급상황 때 큰 도움이 돼요. 밑에 ‘라, 바, 8567’ 이런 건 외워 두실 필요 없고 산 이름 밑에 ‘01-13’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앞자리가 탐방로 번호고 뒷자리가 구간 번호예요. 기점에서 새로운 탐방로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면 뒷자리만 숫자가 하나씩 바뀌니깐 외우기도 쉬워요.”

정 주임의 설명을 들으며 제1연화봉을 넘어 천동삼거리를 향해 능선을 잇는다. 소의 등걸다운 푸근함과 편안함을 만끽한다. 이제 중천으로 떠오른 태양빛을 받아 골짜기 아래 금계저수지가 반짝거린다.

소백산 정상 비로봉.
소백산 정상 비로봉.

“비로봉 정상부에 있던 데크길이 2019년부터 천동삼거리까지 이어졌어요. 주능선의 등산로 보호를 위한 조치죠. 벌써 주목군락이네요.”

비로봉 아래 늘씬하게 늘어선 구상나무의 모습이 먼저 보이고, 몇 걸음 더 걸으니 그 밑 골짜기에 넓게 자리 잡은 주목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정 주임은 “여기선 잘 안 보이는데 주목 밑에 조릿대가 너무 무성하게 자라 주목에게 갈 영양분을 뺏고 있다”며 “2021년 봄이 되면 조릿대 벌목을 위해 인원이 투입될 것”이라고 알려줬다.

어의곡 하산길에서 만난 낙엽송 군락.
어의곡 하산길에서 만난 낙엽송 군락.

빨리 비로봉의 경치를 즐기라는 듯 세찬 바람이 등 떠민다. 계단을 실컷 밟아 비로봉에 오른다. 정상석을 빙 둘러싼 데크로 인해 마치 천문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비로사 기점 등산로의 끝없이 이어지는 데크 계단은 수행의 길처럼 보일 정도다. 소의 등에 올라타기 위해 감수해야 할 몫들이다.

이제 어의곡 방면으로 하산한다. 어의곡 기점 등산로는 사계절 등산객으로 넘쳐나는 소백산 등산로 중 그나마 인적이 드물어 ‘언택트(비대면) 산행’을 즐기기 적합하다. 잠깐 내려서니 능선에서 무수한 겨울바람에 할퀴어진 몸을 울창한 낙엽송 숲이 따뜻하게 품어 준다. 성큼성큼 고도를 내리니 능선에 감도는 겨울이 아직 골짜기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지 못한 듯 가을 날씨 같다. 계곡에는 살얼음이 조금씩 붙고 있다. 소백산의 능선이 ‘흰 소의 등걸’이 될 날이 머지않은 셈이다.

일출산행길잡이 

소백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출맞이 장소는 비로봉과 연화봉. 비로사 기점~비로봉, 희방사 기점~연화봉 모두 2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국망봉 역시 일출맞이 명봉이다. 초암사~비로봉 구간은 약 4km로 3시간은 잡아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제2연화봉대피소 숙박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죽령~제2연화봉대피소 1박 후 연화봉에서 일출을 본 뒤 국망봉~초암사로 하산하는 소백산 종주길, 국망봉을 넘어 고치령까지 나아가는 백두대간 종주길 모두 당일에 소화하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백두대간 종주를 위해 죽령에서 출발한다면 제2연화봉(죽령 4.1km)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 최선이다. 준족이라면 연화봉까지 갈 순 있지만(죽령 7km), 무거운 종주 배낭을 메고, 눈 쌓인 등산로를 따라 빠르게 고도를 높이는 건 다소 무리가 따른다.

어의곡삼거리에서 하산하는 길은 대체로 평탄하지만, 간혹 가파르고 미끄러운 구간이 많아 신중하게 하산해야 한다.

소백산은 기점별로 입산지정시간제를 운영한다. 동절기에는 어느 기점이든 오후 1시가 넘으면 산행을 금지한다. 일출 2시간 전, 일몰 2시간 후 야간산행은 금지돼 있다.

교통

영주에서 풍기(풍기역)를 거쳐 희방사, 죽령을 경유하는 25번 버스가 1일 10회(06:20~19:35) 운행한다. 운행 중 죽령을 경유하는 건 단 2번으로, 영주발 08시, 15시 버스와 희방사발 09시, 16시 버스다.

문의 영주여객 633-0011.

풍기 일대에서 숙박한 후, 희방사나 죽령 들머리로 이동하려면 최적의 선택은 택시다. 풍기역에서 희방탐방지원센터까지는 약 15분, 택시비 1만2,000원, 죽령탐방지원센터까지는 약 45분에 1만7,000원 정도 나온다.

어의곡주차장(새밭주차장)에서 단양 읍내로 나가는 600번대 버스는 1일 7회(07:05, 09:40, 11:40, 13:50, 16:05, 18:20, 19:25) 운행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버스 운행 계획이 계속 변동되고 있으므로 사전에 단양군 문화관광 홈페이지(danyang.go.kr/tour)에서 운행 시간을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숙식(지역번호 054)

희방사 입구에 모텔2010(638-2010), 식당과 슈퍼를 겸한 소백산호스텔(0507-1355-1755, 010-2423-1755), 희방모텔(638-8000)이 있으며, 희방사역 인근에는 죽령옛길펜션(635-2445)이 있다.

하산 기점인 어의곡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은 가마골쉼터(0507-1426-8289)가 있다. 들깨감자옹심이(7,000원), 감자전(7,000원)과 찜닭(4만 원)이 대표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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