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소의 해' 특집] 흰 소를 닮은 덕유산…상고대만 빼고 모든 걸 내주었다

입력 2021.01.05 10:50

구천동~백련사~중봉~향적봉~설천봉 약 1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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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자굴에서 중봉으로 오르는 능선에선 합천 가야산~우두산~비계산~오도산에 이르는 산군이 한눈에 조망된다.
덕유산德裕山(1,614.2m)은 크고 높다.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지만 어느 한 곳 거친 곳 없이 부드러운 산세를 지니고 있다. 향적봉에서 바라보는 덕유산 산줄기는 마치 소의 부드러운 등걸을 닮았다.
이름에서도 넉넉함이 묻어난다. 덕유산의 원래 이름은 광여산匡廬山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면 안개가 자욱해져 산속에 숨어 있는 이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안개 덕분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고, 이것이 산 덕분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덕이 많은 산’이라 하여 덕 덕德자에 넉넉할 유裕자를 붙여 덕유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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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동에서 덕유산으로 오르는 베이스캠프인 백련사.
우리 민족에게 소의 존재도 비슷했다. 농민에게 소는 농사를 짓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가축이었다. 소를 부려 논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길러 돈을 벌었다. 목돈이 필요할 땐 소를 팔아 위기를 넘겼다. 기근이 들었을 때는 생명을 구하는 음식이 되었다. 소 자신은 어떻든 간에 사람에게 소는 덕 많고 넉넉한 가축이었던 셈이다.
소의 해를 맞아 덕유산을 찾았다. 이때쯤이면 멋진 상고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최고의 풍경을 담기 위해 일주일 동안 덕유산 날씨를 지켜봤다. 하늘이 파랗고 날이 춥다는 날을 고르고 골라 무주구천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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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은 곤돌라를 타고 정상 바로 밑까지 오르내릴 수 있다.
호젓한 ‘구천동 어사길’
이번 산행은 구천동에서 백련사와 중봉을 거쳐 향적봉에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 덕유산엔 곤돌라가 설치되어 있어 상고대를 찾는 이들은 으레 덕유산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까지 오른다. 하지만 산행은 오름과 내림의 조화가 있어야 제 맛인 법, 바닥부터 차근차근 오르는 재미를 선택하기로 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탈인데요.”
함께 산행할 덕유산국립공원 행정과 천홍래 팀장이 불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어제까지만 해도 안개가 많이 끼긴 했으나 오후 늦게까지 상고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밤새 거짓말처럼 상고대가 녹아버렸단다. 부랴부랴 날씨를 확인하니 구천동보다 향적봉의 기온이 더 높다. 해가 너무 좋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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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동에서 백련사까지 가는 길은 고즈넉한 계곡이 항상 따른다.
“파란 하늘에 상고대가 핀 풍경은 정말 운이 좋아야 해요. 어느 조건 하나만 맞지 않아도 상고대가 피지 않거나 안개가 끼니까요.”
덕유산국립공원 박진 자연환경해설사는 “일주일에 한두 번 향적봉에 올라오지만 파란 하늘 도화지에 하얗게 그린 상고대를 자주 보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일단 정상에 올라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기로 하고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구천동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백련사까지는 6㎞ 남짓한 산책길이다. ‘구천동 어사길’이란 어엿한 이름도 있다. 찻길과 숲길, 계곡길을 넘나들며 백련사까지 가는 동안 ‘구천동 33경’ 중 17개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첫 번째로 만나는 것은 월하탄月下灘이다. 계곡물이 암석단애를 타고 여덟 줄기의 작은 폭포를 이룬다는데, 메마른 겨울이라 그 진면목을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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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 언 살얼음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월하탄은 구천동 33경 중 제15경이에요. 이곳부터 내구천동이 시작되지요. 제1경 나제통문에서 제14경 수경대까지를 외구천동이라 하고요. 말하자면 제15경부터 제33경 덕유산까지가 모두 내구천동에 있는 셈이죠.”
계곡은 여름에 봐야 제대로지만 한적한 겨울에 보는 운치도 좋다. 지도를 보며 곳곳에 숨어 있는 16경 인월담, 17경 사자담, 18경 청류동, 19경 비파담 등을 차례로 찾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백련사에 도착했다. 대웅전 뒤쪽에 향적봉으로 곧장 오르는 등산로가 있지만 우리는 오수자굴과 중봉을 경유해 정상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백련사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곧장 덕유산의 품으로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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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자굴 입구는 마치 사람의 윗입술을 닮았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역고드름
탐방초소를 지나 오수자굴까지는 한적한 계곡길이다. 발에 걸리는 돌부리가 제법 매섭다.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돌 하나도 함부로 치우지 않고 등산로를 만든 까닭이다.
“이 코스는 봄, 여름에 야생화가 정말 좋아요. 5월 정도면 노루삼, 꿩의다리아재비 등을 볼 수 있어요. 덕유산이 철쭉 명산인 건 잘 알고 계시죠?”
박진 해설사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사람을 만나며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업이지만 코로나 시국인 요즘엔 대면 해설을 하는 것보다는 유튜브를 통해 덕유산국립공원의 소식을 전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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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에서 향적봉 방향을 바라본다.
“‘덕유산 일상’이라는 채널이에요. 시작한 지 7개월 정도 되었는데 콘텐츠가 많이 올라간 건 아니지만 직원들이 열심히 만들고 있답니다. 그러니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꼭~ 부탁드려요. 호호.”
그러고 보니 천 팀장과 박 해설사를 만난 지 세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마스크 때문에 서로 제대로 된 얼굴을 못 봤다. 이제 맨 얼굴이 낯선 시대가 되어 가고 있음이다.
오수자굴은 영락없이 사람의 눈을 닮았다. 어찌 보면 윗입술 같기도 하다. 이 커다란 바위에 어찌 이런 구멍이 생겼나 신기할 따름이다. 오수자굴은 조선 명종 때 광주목사를 지냈던 갈천 임훈 선생이 〈향적봉기〉에 ‘계조굴’로 적은 곳이지만 오수자라는 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했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은 오수자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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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과 구상나무, 푸른 조릿대가 함께 자라는 향적봉~중봉 구간.
오수자굴에서는 땅에서 자라는 역易고드름을 볼 수 있다. 역술인들은 ‘덕유산 기가 세서’ 생긴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다. 역고드름이 생기는 원리는 무척 복잡하지만 그 재료는 물과 온도, 바람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역고드름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겨울이 무르익지 않아 아주 작은 역고드름 하나만 달랑 생긴 상태다. 좀 더 추워야 제대로 솟아오른 역고드름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오수자굴에서 잠깐 쉰 뒤 데크계단을 오른다. 이제 중봉까지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햇살이 제법 따뜻하다. 어떻게 산 정상이 아래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느냐고 했었는데 진짜다. 등산로 옆으로는 산죽(조릿대)이 가득하다. 날도 따뜻한데 푸른 조릿대가 더해지니 어김없는 봄 산행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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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뭇가지지만 상고대가 피면 하얀 터널이 펼쳐질 것이다.
크리스마스나무 ‘구상나무’ 볼거리
입고 있던 두터운 외투를 벗고 오르다 보니 어느 새 중봉이다. 중봉은 덕유산의 대표 조망터다. 사방 막힘없는 가운데 남쪽으로 뻗은 덕유산 줄기는 매끈하니 영락없는 소의 등을 닮았고, 그 뒤로 웅장하게 솟은 남덕유는 우락부락한 황소 어깨를 닮았다. 
“상고대는 없지만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저기 지리산도 보이는걸요. 발아래 산그리메 좀 보세요. 이런 ‘그림’은 상고대보다 더 보기 어려운 건데 운이 좋은 것 같은데요!”
 
보통의 산줄기 풍경이 아니었다. 산줄기 사이로 나지막이 안개가 내려앉은 모습은 누군가가 붓으로 덧칠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파란 하늘을 그린 서양화와 먹으로 산줄기 그린 동양화가 하나의 캔버스에 펼쳐진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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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천봉에는 곤돌라 정류장과 휴게소가 있다. 가장 쉽게 덕유산 조망을 즐기는 방법이다.
중봉에서 향적봉을 바라보니 등산객이 제법 많다. 모두들 하얀 상고대를 기대하며 올랐을 것이다. 비록 상고대는 없지만 그보다 더 멋진 절경을 보게 되었으니 저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리라.
중봉과 향적봉 사이에는 아고산대亞高山帶의 대표 수종인 구상나무와 주목이 섞여 있다. 아고산대란 저산대와 고산대의 사이를 말하며 해발 1,500~2,500m 위치이다. 바람과 비가 많고 기온이 낮고 맑은 날이 적어서 키 큰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없다. 침엽수가 주로 자라며 야생화도 많다.
구상나무를 보니 다시 마음이 심란해진다. 구상나무 상고대가 그렇게 멋있다는데…. 하지만 세상 일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라도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상고대보다 더 멋진 보상을 받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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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봉 정상.
향적봉대피소 마당에 라면 냄새가 진동한다. 코로나로 대피소 문은 닫았지만 마당은 언제나 열려 있다. 산에서 먹는 라면이 뺏어먹는 라면과 비슷한 레벨로 맛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차피 곤돌라를 타고 하산할 계획이라 입맛만 다시고 만다.
향적봉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곤돌라가 운행하니 등산복 차림이 아닌 멋쟁이 관광객이 더 많다. 레깅스 등산복 스타일로 ‘인스타그램’ 인증샷을 찍는 젊은 여성들도 정상석을 차례로 차지한다. 과거 향적봉의 풍경에 비하면 한층 젊고 경쾌한 분위기다.
“저거 마이산이네요! 진짜 멋지게 보이는데요!”
천 팀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지난 호 월간<山> 표지에 등장했던 마이산이 보인다. 땅에 깔린 안개 위로 말의 두 귀가 쫑긋 올라와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말 귀다. 그 재미있는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손가락 하트 닮았다”, “옥수수콘 닮았다”며 저마다 독특한 해석을 덧붙인다.
다시 만나요, 덕유산
향적봉에서 설천봉은 금방이다. 이 구간은 덕유산 상고대의 하이라이트다. SNS 등에서 볼 수 있는 덕유산 상고대 터널이 바로 이곳에 만들어진다. 올해는 그 모습을 보나 했는데 못내 아쉽다.
“또 오시면 되죠. 덕유산만큼 오르기 쉬운 산이 어디 있겠어요. 오늘은 등산의 맛을 봤으니 다음번엔 상고대, 눈꽃의 맛을 보셔야죠.”
박 해설가가 다음을 기약하라고 한다. 그래, 넉넉한 ‘어머니 산’이 아니던가. 비록 지금은 떠나지만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면 따뜻하게 품어줄 것이었다.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는 하산길, 발 아래로 스키 타는 사람들이 즐거워 보인다. 부디 새해에는 이 힘든 시국이 끝나길 바라본다.
산행길잡이 
무주구천동 삼공리 기점에서 백련사까지는 일반 차량의 통행을 금지하므로 6㎞(약 1시간 40분) 거리를 꼬박 걸어야 한다.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고 월하탄, 청류동, 금포탄 등 많은 소와 담의 풍경을 즐길 수 있어 힘들지 않다.
백련사 입구 삼거리에서 직진, 국립공원 초소 있는 곳으로 가면 오수자굴 방향이다. 30분쯤 가면 작은 다리가 나오고, 잠시 뒤 지계곡과 합류하는 합수점을 지난다. 1시간가량 계속되는 비교적 평탄한 계곡길이 끝나면 오수자굴이다.
오수자굴을 지나 나무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인 능선길이 시작된다. 평상시에는 오수자굴에서 중봉까지 1시간 남짓이면 오를 수 있지만 눈이 많이 쌓이면 시간이 더 걸린다. 중봉에서 주능선을 따라 30분 정도 오르면 향적봉대피소를 거쳐 향적봉 정상에 선다. 향적봉에서 설천봉까지는 천천히 걸어 10분 정도면 닿는다.
설천봉에서 하산은 세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칠봉을 경유해 인월담 부근으로 내려서는 것인데, 스키 시즌에는 폐쇄된다.
두 번째는 향적봉으로 되돌아가 백련사로 곧장 내려가는 것이다. 마지막은 곤돌라를 타고 덕유산리조트로 내려서는 것이다. 설천봉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운행시간이 오후 4시 30분이다. 2월까지 주말·공휴일에 예약제(www.mdysresort.com)로 운영. 평일은 선착순 발권. 요금 편도 1만2,000원. 기상 여건에 따라 운행을 중단할 수 있으므로 미리 문의(063-322-9000)할 것. 
교통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구천동까지 하루 1회(16:00) 버스가 운행한다. 구천동에서 서울은 07:10. 대전, 전주를 운행하는 버스도 있지만 횟수가 적다. 무주읍내 무주공용버스터미널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 서울, 대전, 전주 등지에서 버스 운행이 많다. 버스터미널에서 구천동까지 직행버스가 1일 7회 다닌다. 요금 4,700원. 택시를 타면 2만5,000원 정도 나온다. 덕유산리조트로 하산해 구천동까지 차를 회수하러 가야한다면 택시로 1만 원 정도 나온다. 
숙식(지역번호 063)
무주리조트와 구천동탐방지원센터 인근에 펜션 등 숙소와 식당이 밀집해 있다. 무주리조트 입구의 예촌본가(322-5665)는 돼지석갈비 (1만5,000원), 능이버섯전골(1만5,000원), 왕갈비탕(1만2,000원), 우렁 된장찌개 (9,000원) 등을 낸다. 삼공리 관광단지에 있는 원조할매보쌈식당(322-2188)은 보쌈정식이 별미다. 보쌈정식 2인분 4만 원이며 20가지 반찬과 된장찌개, 달걀찜이 나온다. 능이버섯해장국(1만 원), 산채비빔밥(9,000원) 등 식사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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