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다이어리] 히말라야만 쳐다보던 나를 코로나가 바꿨다

  • 글·사진 거칠부(필명)
    입력 2020.12.24 11:25

    문경에서 사과 따기 아르바이트 하며 우리 산의 아름다움에 눈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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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밭에서 본 주흘산. 문경에서 사과 따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변 산을 다녔다.
    처음 산에 간 건 1998년 8월, 스물한 살 때였다. 친구를 따라서 PC통신 산악회인 유니텔 산사랑에 가입했고, 첫 산행으로 명지산에 갔다. 당시 산악회에서는 버스에서도, 조별산행에서도, 전체모임에서도 띠별로 자기소개를 시켰다. 반복되는 소개에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두 살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속된 말로 뻥을 쳤다. 결혼해서 애가 있고 남편은 군대에 가 있다고. 의외로 사람들은 나의 장난을 신선하게 받아들였고, 그 일은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결과가 됐다. 
    첫 산행이 마지막 산행이 될 거라 예상했지만, 다음 산행에도 참여했고 자연스럽게 열혈 멤버가 되었다. 여성 최초로 최다 산행자가 되고, 등산학교를 다니고, 모든 산행에 참가했다. 나의 산행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사용한 ‘거칠부’라는 필명은 지금까지 나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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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 산북면의 고찰 김룡사. 오랜 역사만큼이나 깊이 있는 단풍이었다.
    “너는 산에 다닐 얼굴 아냐”
    20대 중반에 ‘산행독립’을 했다. 더 이상 산악회를 따라다니지 않았다. 24세 봄, 내 생일에 처음으로 혼자 야영산행을 했다. 2박3일 동안 영남알프스를 종주하고, 그해 여름엔 지리산 종주도 나섰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지리산 마니아가 되어 생일 때마다, 성탄절마다 홀로 지리산을 찾았다. 
    20대의 많은 날을 지리산에서 보냈다. 사람들은 자그마한 몸집에 동그란 눈을 가진 내게 산에 다닐 얼굴이 아니라고 했다. 얼마 못 다니고 그만 둘 거라고 했다. 산에 다닐 얼굴이 아니었던 나는 지금도 여전히 산을 찾고 있다. 히말라야를 걸으며 뜨거웠던 20대보다 더한 40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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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백두대간 종주를 회상하며 하늘재산장을 찾았다.
    산을 좋아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애초에 좋아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산은 그냥 산이었고, 나는 어쩌다 친구 따라 산에 갔다. 그 산행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산행을 위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산행능력을 겸비하거나 유리한 신체조건을 가진 것도 아니다. 점점 저질체력이 되어가면서도 나의 마음은 늘 산에 고정되어 있다. 
    ‘좋아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나 사물 따위에 대하여 좋은 느낌을 가지다’이다. 그렇다면 나는 산을 좋아하는 게 맞다. 산에 대해선 언제나 좋은 느낌이다. 내가 당장 그 산에 가지 않아도, 산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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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트레킹 중에도 일기를 쓰는 건 오랜 습관이다.
    여행의 마무리는 글쓰기여야 한다
    나는 첫 산행부터 지금까지 모든 산행을 기록했다. 올해로 24년째다. 지금껏 쓴 산행과 여행 기록만 1,800여 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조금 멀리 생각했다. 이렇게 남겨놓은 기록이 내 나이 예순이 되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고독과 슬픔, 기쁨과 추억 따위를 생생한 글로 남겨놓은 건, 내 생애 가장 잘 한 일이다. 예순의 내가 스물다섯의 글을 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면서 이상하다. 아마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나, 혹은 자식 같은 나, 어쩌면 타인 같은 나일지도 모르겠다. 
    히말라야 트레킹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몇 권의 수첩을 챙긴다. 일기를 쓰기 위해서다. 편리한 스마트폰을 두고도, 나는 여전히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펜을 잡는다. 걸으면서 느꼈던 나의 감정들을 날것 그대로 솔직하게 남기기 위해서다. 가끔은 나의 거친 감정에 부끄럽기도 하지만, 희한하게도 일기장에 적힌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효음식처럼 숙성된다. 몰이해가 이해가 되고, 미움이 미안함이 되고, 나의 옳음이 편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여행의 마무리는 기록, 즉 글쓰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상처받은 나의 영혼을 치유하고, 상처를 준 누군가의 영혼에 미안함을 갖는다. 분명했던 내 입장은 제3자의 눈이 되어 내 입장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제 산행기록은 단순한 기록의 의미에서 나를 치유하고 정화하는 작업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 기록은 산행에 버금간다. 기록을 할 수 없다면 나의 산행은 생기를 잃을지도 모른다.  
    마흔이 되기 전 회사를 그만둘 때 다짐한 게 있었다. 여행 경비로 1억 원을 써보자. 2013년, 17년 동안 일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 이후 6년 동안 히말라야 오지를 걸으며 그 돈을 썼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렇게 오랫동안 히말라야를 다니면 돈이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냐고. 나는 전 재산을 털어서 여행 다닐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 않다.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인 사람이며, 감당하지 못할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나는 20대 초반에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노후준비를 했다. 늙어서 가족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폐를 끼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의지하며 사는 것이 불편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이 딱 맞는 옷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내가 독립적이길 원했다. 그중에서 경제적인 독립은 반드시 필요했다. 때문에 직장 다니는 동안 돈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요새는 뭔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돈을 벌지 않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히말라야에 가지 않는다면 나는 돈을 벌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히말라야에 가려면 생활비를 넘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돈은 누구에게나 정말 현실적인 문제다. 
    현재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대책 없이 소비하지는 않는다. 피 끓는 20대라면 몰라도, 통장 잔고도 없이 무작정 떠나는 여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여행이 즐거웠을지는 몰라도, 부족한 통장 잔고만큼 가족이나 지인에게 기대게 될 수도 있다. 
    나의 자유를 위해 내 주변이 희생하는 걸 원치 않는다. 그저 내가 가진 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그에 대해 책임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히말라야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내가 가진 만큼만 걷고 볼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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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히말라야 트레킹할 때 찍은 돌포 풍경.
    2020년에는 히말라야에 가지 못하는 시간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보냈다. 가을에는 지인의 소개로 문경에서 한 달 동안 사과 따는 일을 했다. 사과를 따다가도 휴일이면 문경새재를 비롯한 주변의 산을 찾아다녔다. 
    문경은 백두대간에서 단일지역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곳이라, 어디를 봐도 들판보다 산이 먼저 들어왔다. 지인이 빌려준 산장에서 아침마다 빛나는 주흘산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섬(강화도)에서 태어났고 섬에서 살았지만 바다보다 산을 마주할 때 더 편안했다. 생애 한 번은 산골짜기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늠름한 백구와 애교 많은 고양이와 함께 살면 참 좋겠다.
    문경에서 가장 먼저 찾은 산은 암릉미가 일품인 수리봉과 성주봉이었다. 시작부터 된비알인 이곳은, 곳곳에 밧줄이 놓여 있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시원한 조망 덕분에 걷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다음에 찾은 곳은 단풍이 곱게 물든 문경새재와 마패봉이었다. 
    3관문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백두대간을 종주할 당시 이곳을 홀로 지나던 때가 생각났다. 안내산악회 버스가 잘못 내려주는 바람에 이화령터널에서 이화령까지 길도 없는 곳을 걷고, 조령산부터 신선암봉을 지나 3관문에 도착한 게 오후 4시였다. 휴게소에서 파전에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내려갈까 말까 얼마나 고민이 되던지. 결국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4시를 훌쩍 넘긴 뒤에야 마패봉으로 출발했다. 
    내가 다시 마패봉에 가보기로 한 건 그 기억 때문이었다. 0.9㎞의 가파른 길은 잠시 갈등하게 만들었지만, 뭉클한 추억이 발길을 이끌었다. 정상에 서서 부봉삼거리와 하늘재로 향하는 이정표를 보면서 언젠가는 이 길을 다시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아주 천천히, 가벼운 짐만 지고 연연해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걷고 싶다. 
    비 오는 날 찾은 김룡사는 단풍이 절정이라 어디서도 못 본 가을을 만났다. 새삼 우리나라의 산하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었다. 이리 아름다운 계절을 두고 너무 멀리만 찾아다녔던 건 아닐까, 괜히 마음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천주산에도 가봤다. 천주사부터 0.8㎞라는 거리는 만만해 보였지만, 가파른 절벽에 설치된 계단은 뭔가 두려운 즐거움을 주었다. 칼날 능선 끝에 있던 정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 줄기는 또 얼마나 가슴 벅차게 하던지. 
    내가 백두대간을 걸었던 그 해는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그런데도 나는 금요일이면 퇴근 후 밤차를 타고 산으로 향했다. 비옷 대신 농약 방제복을 입고, 빗속에 텐트를 치고, 다시 걷는 일을 5개월 반 동안 이어갔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하늘재였다. 산장에서 따뜻한 국수라도 먹을까 했는데, 산장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3관문에서 출발했던 그날, 나는 밤 8시가 되어 이곳에 도착했다. 그때는 하늘재 산장에서 민박이 가능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주인아주머니와 막걸리 한 통을 나눠 마시고, 백두대간 북진 후 다시 남진하는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가 벌써 10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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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터들의 천막과 한가로이 풀을 뜯는 당나귀. 필자는 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일 1,700㎞를 2017년 완주했다.
    우리나라에 산 많다는 것 자체로 행복
    나는 문경에 사과를 따러 왔지만 어쩐 일인지 산에 대한 열망만 커졌다. 잊고 있었던 내 나라의 아름다움을 상기하며,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내가 히말라야에 갈 수 없게 된다면, 더 이상 그곳에 대한 미련이 없다면, 그때는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어졌다. 100산이 아닌 1,000산을 걷고, 산 아래 절집에 들러 마무리 못한 108산사 108배 여행도 잇고 싶어졌다.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것, 코로나로 히말라야에 가지 못하는 공백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했다. 
    행복은 어떤 ‘사건’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한다. 히말라야에 가지 못하는 사건에 우울하던 마음이 어느새 말랑말랑해졌다. 우리나라에 산이 넘친다는 것, 그것 자체로 행복의 이유가 되었다. 
    사과를 딸 때 한 농장의 할아버지는 “농사일이란 천천히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라 했다. 산행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천천히 꾸준히, 그래야 오래 간다. 조급해할수록 산은 마음에서 멀어진다. 하고 싶은 마음,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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