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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낭만야영] 운탄고도… 징글징글하던 어둠 속 숲, 아침에 텐트를 여니 온통 설국!

글·사진 민미정 백패커
  • 입력 2021.01.0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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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대와 운탄고도의 만남, 마음 가는 대로 걸었던 2박3일 백패킹

과연 어디로 가면 눈을 만날 수 있을까? 겨울 백패킹 장소를 정할 때 가장 고민하는 것이다. 맛있는 게 먹고 싶을 때 단골 맛집에 가듯, ‘설경 맛집’은 강원도 정선의 운탄고도다. 운탄고도는 만항재에서 40㎞ 떨어진 함백역까지 석탄을 실어 나르던 해발 1,000m 산비탈의 임도였다. 

1980년대까지 석탄가루 흩날리며 산업화를 이끈 이 장대한 산중도로는 ‘석탄을 나르던 옛길運炭古道’에서 구름이 양탄자처럼 펼쳐져 있는 옛길雲坦古道로 변모하며 지금의 청정한 ‘하늘길’로 탈바꿈했다. 눈이 내린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눈이 없어도 낙엽송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운탄고도는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다. 

장거리 단골 산행 파트너인 김혜연과 모처럼 3일의 휴가를 맞춰 코스를 정했다. 둘 다 뚜벅이 신세라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쉬운 곳을 들머리로 정했다. 첫날은 도사곡휴양림에서 시작해 화절령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걷고, 이후에는 화절령에서 운탄고도를 따라 걷고 싶은 만큼 걷기로 했다. 

화절령은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과 정선군 사북읍의 경계에 위치한 백운산 자락에 있는 고개로 봄철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해 길 가는 나그네와 나무꾼들이 한 아름 꺾어갔다 하여 꽃꺾이재, 화절치花切峙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배낭은 평소보다 간소하게 채웠다. 도사곡에서 화절령까지 일부 구간은 오지이기에 산중에서 숙영할 것을 대비해 텐트 한 동과 발열도시락을 식사로 준비했다. 눈이 왔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눈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버스에 올랐다. 

고한터미널에 내리자 싸늘한 공기에 순간 몸이 경직됐다. 요 며칠 푸근했던 서울 날씨에 방심했다. 배낭에서 얇은 우모복을 꺼내 입었다. 터미널 근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도사곡휴양림으로 이동했다. 

중천에서 내리쬐는 푸근한 햇살에 재킷을 벗어 넣었지만, 하늘로 곧게 뻗은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 물소리를 따라 이어진 길은 점점 계곡에서 멀어졌다. 경사가 심해지자, 만물이 겨울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간혹 거친 숨소리와 이따금씩 돌멩이에 부딪치는 스틱 소리만 정적을 깼다. 

화절령 가는 길. 안개에 쫓겨 산중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아름다운 상고대를 바라보는 김혜연.
화절령 가는 길. 안개에 쫓겨 산중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아름다운 상고대를 바라보는 김혜연.

샘터를 지나 주목이 나타나자 멈춰 숨을 골랐다. 메마른 살풍경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1,100년의 건재함을 자랑하듯 푸른 이파리를 드러내며 당당하게 서있는 주목의 높이는 17m나 된다. 두 번째 주목의 나이는 1,400년, 세 번째는 1,200년이라고 한다.

모진풍파를 겪으며 1,000년을 살아왔을 국내 최고령의 거목 삼형제는 계절을 달리하며 여러 번 봐도 경이롭다. 능선에 올라서자 동서로 나뉜 화절령 갈림길이다. 서쪽은 두위봉으로 이어지는 길로 그곳에도 좋은 숙영지가 있지만, 다음날 가볍게 걷기 위해 동쪽의 화절령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거진 잔가지나무 숲을 벗어나자 너덜지대다. 발자국 하나 없는 잔설에 덮인 미끄러운 바위더미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어설프게 녹아내린 눈은 가뜩이나 인적 없어 분간하기 어려운 등산로를 더욱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 

해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서편으로 기울어 가고, 자꾸만 등로를 이탈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초조해졌다. 애초에 늦은 출발이라 화절령에 닿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텐트 칠 공간은 확보해야 했다. 갈퀴처럼 얽히고설킨 메마른 나뭇가지들은 좀처럼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경사는 급해지고 우리는 힘을 분배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찾아갔다. 점점 기온이 떨어지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뒤쪽으로 자욱한 안개가 몰려왔다. 멀리 두위봉은 이미 안개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길을 찾기보다는 어두워지기 전에 숙영지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약간 비탈졌지만 텐트 하나 칠 만한 공간이 있어 배낭을 내려두고, 더 좋은 숙영지를 찾아 앞으로 가봤다. 얄궂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어 포기하고 되돌아 왔다. 음지에 쌓인 눈을 대충 다지고 텐트를 쳤다. 

어둠이 드리워지고 텐트에 불이 들어오니 나름 아늑했다. 땀에 전 옷을 갈아입은 뒤 자리 잡고 앉은 우리는 2019년 여름의 홋카이도 다이세츠산大雪山 종주를 추억했다. 우리 키만 한 산죽에 파묻혀 허우적대다가 겨우 무인산장에 도착했을 때, 만년설이 녹아 없어져 식수를 보급하지 못해 500㎖도 안 되는 물로 연명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다행히 다음날 하산하는 현지인의 배려로 귀한 식수와 맥주까지 공짜로 얻고, 함께 저녁을 보냈던 일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원정길에 사서 고생한 이야기를 모두 꺼내보면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하다. 

 눈을 포기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설경에 전날의 피곤함이 싹 가시는 듯했다.
눈을 포기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설경에 전날의 피곤함이 싹 가시는 듯했다.

환상적 풍경에 연신 셔터를 누르다

다음날 아침, 내 몸은 살짝 접힌 채 웅덩이 속에 처박혀 있었다. 다졌던 눈이 녹아내린 곳이 하필이면 웅덩이였던 것이다. 세계 여행을 할 땐 하루 종일 걷다가 누울 자리만 있으면 잤으니 허리가 꺾이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는 수평에서 한 치도 틀어져 자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편하고 아늑한 숙영지만 엄선했다. 

반듯하게 잘 자고 일어난 혜연이는 뽑기를 잘했다며 얄궂은 농을 던졌다. 차를 한잔 마시고 철수하기 위해 텐트 문을 열어 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징글징글하게 뻗어 있던 나뭇가지에 하얀 상고대가 만발해 있던 것이다. 멋진 경치라고는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둘레길에서 만난 너덜 구간. 멋진 풍경을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본다. 4  3일차 아침, 해가 뜨자 백운산 자락에 쓰나미처럼 펼쳐진 상고대가 은빛 파도처럼 빛났다.
둘레길에서 만난 너덜 구간. 멋진 풍경을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본다. 4 3일차 아침, 해가 뜨자 백운산 자락에 쓰나미처럼 펼쳐진 상고대가 은빛 파도처럼 빛났다.

눈에만 담기엔 아름다움이 차고 넘쳤다. 환상적인 상고대 풍경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어제의 음산한 안개가 선사해 준 뜻밖의 선물은 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는 느리게 걸으며 경치를 제대로 즐겼다. 상고대는 오후가 되어도 남아 있었다. 차가운 기온 덕분에 화절령에서 하이원으로 이어지는 하늘길은 상고대로 치장한 하얀 낙엽송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운탄고도를 따라 만항재로 가려던 우리는 슈가 파우더를 뿌려놓은 듯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 한켠에 배낭을 내려놓고 텐트를 쳤다. 멀리 백운산 정상 언저리로 안개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기울었다.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상고대는 짙어졌다. 

무게가 무거워 가져갈지 말지 고민하다 설경을 기대하며 챙겨 넣었던 드론을 꺼냈다. 천천히 비행하는 드론의 렌즈로 투영되는 항공뷰는 환상적이었다.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는다면 다큐라도 찍고 싶을 정도였다. 텐트 문을 열어놓고 설경에 스며드는 어둠을 감상했다. 잿빛 구름이 잠깐씩 열리는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보며 어제의 무용담을 이어갔다. 

설렘 가득 짊어진 백패커들이 운탄고도를 따라 얼음왕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설렘 가득 짊어진 백패커들이 운탄고도를 따라 얼음왕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상고대가 사라질세라 텐트 문을 열었다. 하얀 설국은 파란 하늘까지 더해져 최고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신바람 난 우리는 머나먼 만항재까지 갈 것도 없이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한 후, 하이원리조트 스키장으로 올라가 곤돌라 위에서 설경을 만끽하기로 했다. 

평평한 하늘길과 달리 둘레길은 산 중턱에 고도차를 내며 이어져 있어 걷는 재미가 있었다. 둘레길은 하이원탑으로 오르는 가파른 ‘고원숲길’로 이어졌다. 걸음수가 누적될수록 발걸음은 더뎌지고, 침묵 속에서 희미한 입김만이 허공을 맴돌다 흩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30분을 쉼 없이 올랐다. 하이원탑에 도착해 북적대는 스키어들 사이를 헤치고 곤돌라 승강장으로 향했다. 곤돌라에서 하얗게 펼쳐진 낭만적인 설경을 감상하며 설렘 속에 산행을 마무리했다. 

너덜을 따라 올라서자 하늘과 닿을 듯 길게 늘어선 두위봉 능선이 드러났다.
너덜을 따라 올라서자 하늘과 닿을 듯 길게 늘어선 두위봉 능선이 드러났다.
산행코스

■ 정선군 사북읍사무소에서 도사곡 휴양림 주차장까지 택시 이동.

첫째날 도사곡휴양림(해발 700m) ~ 주목군락지(1,300m) ~ 화절령 갈림길(1,330m) ~ 숙영지(1,438m) : 6㎞ 4시간 소요

둘째날 숙영지 ~ 최고점(1,452m) ~ 화절령(1,090m) ~ 하늘길 숙영지(1,305m) : 10㎞ 6시간 소요

셋째날 하늘길 숙영지(1,287m) ~ 하이원 둘레길2 & 고원숲길2 분기점(1,218m) ~ 하이원탑(1,355m) ~ 곤돌라로 하산 : 4㎞ 1시간 30분 소요.

주의사항

■ 화절령 갈림길에서 화절령까지는 인적이 드물어 등산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다. 반드시 코스를 숙지하고 가능하면 GPS나 지도를 지참하는 것이 좋다.

■ 기온의 급격한 변화에 대비 해 보온장비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 등산로가 북향의 경사로에 있어 잔설이나 얼음이 있으므로, 강설예보가 없더라도 반드시 아이젠과 스패츠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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