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살린 여덟 공신… 1000년 역사 되살린 길

  • 글·사진 최원식 대구산악연맹 이사, 영남일보 주말산행 필자
    입력 2021.02.18 09:05

    대도시 걷기길 '대구 팔공산 왕건길'
    대구 동구청에서 만든 총 35km, 8개 코스의 걷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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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길 3구간에서 본 팔공산 주능선과 동화사집단시설지구.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찍었다.
    대구·경북의 명산인 팔공산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대구 동구청이 왕건 설화를 바탕으로 국토교통부 전국 누리길 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된 ‘팔공산 왕건길’을 만들었다.
    왕건길은 흙길 위주의 산책길과 숲길이 어우러진 친환경 탐방로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동수전투(지금의 지묘동) 설화를 바탕으로 총 35km, 8개의 코스를 조성했다. 8개 구간은 주제별로 용호상박길, 열린 하늘길, 묵연 체험길, 문화예술길, 고진감래길, 호연지기길, 가팔환초길, 구사일생길로 나누었다. 구간마다 왕건의 가상행적과 관련된 픽토그램을 제공해 다양한 이미지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꾸몄다. 픽토그램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상징적인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왕건길의 주요 테마인 동수전투는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벌여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비롯해 8명의 장수가 죽은, 왕건이 대패한 전투다. 이때 여덟 공신이 죽었다 하여 팔공산으로 이름 붙었다는 설화가 있다. 당시 왕건이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 장군이 왕건의 갑옷을 바꿔 입고 변장해 왕건이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도록 하고 그는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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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길 3구간 시작지점의 묵연 표석.
    북극한파가 덮쳐 떠들썩한 날, 신숭겸 장군 유적지 앞에 섰다. 기온은 -12.5°C이지만 거센 바람이 합세하면서 체감온도는 -20°C까지 떨어졌다. 마스크 사이로 삐져나온 입김에 눈썹이 얼어붙을 정도지만, 다행인 것은 맑다 못해 시퍼런 하늘이다.
    유적지를 둘러보고 옆문으로 빠져나오니 팔공산 왕건길 시작 지점이다. 지묘2교 앞에 왕건길 종합안내판이 있다. 자연석에 1구간 개념도를 새겨 세웠고, 청색과 적색의 화살표로 진행 방향을 알려 준다.
    1구간은 ‘대구올레 한실골 가는 길’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이정표가 나란히 서있다. 왕건길은 청색과 적색 리본을 매달아 두었고, 대구올레길은 녹색과 청색 리본이다. 때문에 갈림길에서는 반드시 왕건길 리본을 확인해 길을 이어야 한다.
    넓은 차도를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 작은 저수지인 대곡지를 지난다. ‘대곡지 에코갤러리’, ‘공산전투 왕건 역사 발자취길’ 안내문이 나란히 서있다. 포장길은 흙길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모재遠慕齋’ 안내판을 만난다. 경주최씨 한천공파 문중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조상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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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로 만들어 친환경적인 왕건길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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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길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기.
    거저산, 거저먹는 산 아냐
    완만한 임도 따라 10분을 오르니 체육공원이 있다. 여기까지가 동네 산책 코스이다. 이후부터 경사가 가팔라진다. 호흡이 가빠져 마스크를 벗었다가 턱이 시려 다시 끼기를 반복한다. 쉬엄쉬엄 15분을 오르니 만디체육시설 안부다. ‘만디’ 혹은 ‘만대이’는 경상도 방언으로 산꼭대기나 산마루를 뜻한다. 모퉁이를 돌아나가니 팔공산 주능선이 한눈에 드는 전망대다. 투명 스크린에 번호를 매겨 봉우리 이름을 알기 쉽게 만들어 놓았다. 완만한 내리막 임도를 따라 가니 열재十領에 닿는다. 1구간 끝나는 지점이며 2구간 시작되는 곳이다.
    신라시대 영천에서 능성재 넘어 미대동을 지나 이곳 고개를 넘어 대구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열 사람이 다닐 정도로 넓은 길이라 열재라 불렀다는 설과, 산세가 험하고 산적이 많아 10명 이상 모여서 고개를 넘었다는 설이 있다.
    1구간만 걷는다면 여기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만디체육시설에서 응봉을 올랐다가 능선을 따라 신숭겸 장군 유적지로 원점회귀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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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구간 종료지점이자 2구간 시작지점인 열재.
    열재에서 대구올레길은 용진마을로 내려가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와 대구자연염색 박물관으로 이어지고, 왕건길은 정면의 능선을 따른다. 작은 오르내림은 있지만 힘들지 않은 구간이다. 25분 정도 오르면 하늘다리를 지난다. 계단이 놓인 입구에 ‘거저산’으로 표기한 이정표가 있고, 왕건길을 표시한 리본이 걸려 있다. 일행이 몇 계단 오르더니 “이름은 거저산인데 거저 오르는 산이 아니네”라고 일리 있는 농을 던진다.
    시작부터 꾸준히 오르막인데다 낙엽까지 두텁게 깔려 눈길을 걷는 듯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30분쯤 오르니 거저산 정상이다. ‘거저산 520m’라 적힌 푯말과 평상이 놓여 있다. 정면으로 팔공산이 보이지만 숲에 가려 시원치는 않다. 왼쪽으로 팔공산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걷는 느낌이다.
    정오가 가까워져도 기온은 여전히 영하권이다. 야트막한 봉우리를 올라서니 ‘하늘마루’ 푯말이 나무에 걸려 있고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팔공산과 동촌, 반야월 방향의 조망이 시원하다. 2구간에서 가장 탁 트인 전망대다. 이곳 때문에 ‘열린 하늘길’이라 이름 붙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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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숭겸 장군 유적지 내의 순절단.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 있던 곳이다.
    긴 내리막을 내려선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바람도 잦아들고 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르니 아늑한 기분이다. 30분쯤 내려서니 마을 앞 찻길이다. 이내 팔공산에서 흘러내린 용수천을 가로지르는 부남교에 이른다.
    부남교를 건너면 걷기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데, 2구간 끝이자 3구간 시작점이다. 여기서 걷기를 마친다면 부남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약 2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팔공1번 버스를 타거나, 큰 도로인 팔공로까지 2.5km를 걸어 나가면 미곡교 앞 버스승강장에서 수시로 지나는 버스를 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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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구간 하늘마루에서 본 팔공산.
    한파 뚫고 3개 구간 완주해
    새로 깔린 듯 말끔한 아스팔트길을 따라 마을 사이로 들어간다. 전봇대에 왕건길 표시 리본이 걸렸다. 산과 밭 사이에 좁게 길이 나있다. 왼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산모퉁이를 돌아나가니 묵연센터 정자쉼터다. 3구간 묵연 체험길 개념도를 돌에 새겨두었다.
    달성서씨 시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중심재 앞을 돌아나가면 솔밭 입구에 '묵연默然'이라 적은 표지석이 나타난다. 좁은 계곡 사이로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른다. 10분을 오르면 계곡을 건너 산허리를 돌도록 길이 이어진다. 마침 계단 위로 바윗돌이 떨어져 길을 가로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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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치 있는 소나무가 숲을 이룬 왕건길.
    산허리를 크게 돌았다가 다시 왼쪽으로 틀어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솔밭 사이를 지나는 길인데 묵연 표석을 지나서인지 잡념 없이 숙연해진다. S자를 그리며 산허리를 돌아 오르니 조금 전에 지났던 길이 내려다보인다. 동행한 친구는 바로 오르면 되는데 속았다며 껄껄거린다. 돌아난 길을 다 올라서니 통시바위가 있다. 가운데가 갈라져 널빤지를 깐 재래식 화장실을 닮은 바위다.
    25분쯤 지나니 남쪽으로 시야가 터지는 발바닥 바위를 만난다. 각도에 따라서 발바닥 모양으로 보이겠으나 얼핏 봐서는 그리 닮은 것 같지 않다. 완만한 능선을 따르자 작은 능선 갈림길이다. ‘부남교 2.8㎞, 물넘재 2.6㎞’ 적은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인데 정면은 4구간으로 연결되는 물넘재 방향이고, 왼쪽은 이정표는 없지만 팔공산 동화사집단시설지구와 자동차극장 방향이다.
    물넘재를 지나 4구간을 이어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팔공산 풍경이 좋은 동화사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이윽고 통신시설과 산불감시초소가 나란히 세워진 전망터다. 팔공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가 멋진 곳이다. 5분만 내려서면 씨네80 자동차극장이고, 팔공산을 오가는 시내버스 급행1번 종점에 닿는다. 버스에 오르니 몸이 사르륵 녹아내린다. 치열한 격전지였던 왕건길에서 전투 못지않은 추위와 싸워 살아남은 장수가 된 듯 뿌듯하다. 살아남은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랄까. 
    왕건길 1~3구간 길잡이
    신숭겸 장군 유적지 주차장 -15분- 대곡지 -10분- 원모재 -20분- 만디체육시설 -6분- 왕건 전망대 -10분- 열재 -25분- 하늘다리 -30분- 거저산 -15분- 하늘마루 -30분- 부남교 -20분- 중심재 -35분- 통시바위 -40분- 동화사집단시설지구 물넘재 갈림길 -15분- 동화사지구 버스 종점 
    <총 15km, 5시간 30분 소요>
    1구간 용호상박길 
    왕건과 견훤이 나라의 명운을 걸고 격렬한 전투를 펼쳤다는 의미다. 임도를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길이며 팔공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왕건길 전망대가 있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열재. 4.3km
    2구간 열린 하늘길 
    왕건이 견훤의 군사에 패해 도주하다가 날이 어두워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다행히 숲 사이로 하늘이 열려 길을 찾아 도망갔던 길로, 거저산과 하늘마루를 지나며 보는 팔공산 풍경이 일품인 구간이다. 
    열재~부남교. 4.5km
    3구간 묵연 체험길 
    산길을 걸으며 자연을 느끼고 침묵하면서 묵연默然을 통해 자아를 성찰해 보는 길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산허리를 돌아 오르도록 길이 나있다. 부남교~물넘재 5.4km
    4구간 문화예술길 
    동화사 옛길, 과거길, 방짜유기박물관 등 전통문화유산을 둘러볼 수 있는 길이다. 물넘재~백안삼거리. 3.3km
    5구간 고진감래길 
    처음 걸을 때에는 거친 숨을 들이쉬지만 주능선에 오르면 즐거움이 더하다는 뜻과, 왕건이 견훤을 피해 고생 끝에 도피에 성공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길이다. 백안삼거리〜평광 종점. 5.2km
    6구간 호연지기길 
    요령봉에 올라 호연지기를 기르면서 주변 경관을 보며 감탄하게 된다. 요령봉에서 안심·반야월 일대를 조망할 수 있고, 첨백당과 평광 사과나무길 등 볼거리가 많은 구간이다. 평광 종점〜매여 종점. 5km
    7구간 가팔환초길 
    왕건이 하늘에 제를 올린 곳으로 가산·팔공산·환성산·초례산이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고 해 앞 글자를 따와 ‘가팔환초’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매여 종점~초례봉. 3.3km
    8구간 구사일생길 
    왕건이 견훤의 추격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는 곳에 도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뜻으로 현재에도 ‘안심安心’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초례봉~동곡지. 4km
    교통
    경부고속도로와 대구포항고속도로가 만나는 팔공산IC에서 내려 우회전해 약 4.5km를 가 파군재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파군재삼거리에서 600m 지점 왕산교에서 우회전해 400m를 가면 신숭겸 장군 유적지 앞 지묘2교가 나온다. 유적지 내 주차장 주차. 이용료는 무료.
    동대구역에서 대구도시철도 1호선 안심 방향 아양교역에서 2번출구로 나와 시내버스 급행1번, 팔공1번으로 환승한 다음 팔공보성아파트 앞에서 내린다. 도로 건너 아파트 옆길로 나가면 지묘2교가 나온다. 내비게이션  대구광역시 동구 신숭겸길 17(신숭겸장군 유적지 주차장)
    숙식(지역번호 053)
    동화사 집단시설지구 버스종점 부근에는 식당과 카페, 숙박업소가 많이 있고, 4구간 종점인 백안삼거리 부근에 순두부를 전문으로 하는 산골식당(983-0362), 도로 건너편에 돼지찌개 전문점 북촌식육식당(985-4780)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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