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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나홀로 세계일주] 일본 북알프스 종주… 5월에 맛본 눈의 왕국 창처럼 뾰족한 야리가다케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 입력 2021.02.1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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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코치~야리가다케 원점 회귀 41.5km

야리가다케 정상에서 바라본 야리가다케산장의 모습. 하얀 설원과 붉은 건물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야리가다케 정상에서는 어느 곳 하나 막힘없이 탁 트인 설국을 즐길 수 있다.
야리가다케 정상에서 바라본 야리가다케산장의 모습. 하얀 설원과 붉은 건물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야리가다케 정상에서는 어느 곳 하나 막힘없이 탁 트인 설국을 즐길 수 있다.

일본 북알프스의 정식명칭은 히다산맥. 일본 최고의 산악비경을 보여 주고 사계절 각기 다른 매력을 풍긴다. 기후현, 도야마현, 나가노현, 3개 현에 걸쳐 길게 뻗어 있은 산맥이다. 

5월의 북알프스는 봄이라기보다는 초겨울에 가깝다. 거센 바람과 추위가 이어지지만 피켈과 클램폰이 필수일 정도로 눈으로 가득한 설산을 걷는 즐거움은 좀처럼 국내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경험이다. 

야리가다케槍ヶ岳(3,180m)에서 오쿠호다카다케奧穗高岳(3,190m)로 이어지는 3,000m급 북알프스 연봉 종주 코스는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코스다. 정상의 모습이 마치 뾰족한 창과 비슷하다고 해서 야리가다케(창의 산)라고 부른다. 고생대층의 암석이 빙식으로 깎이면서 뾰족하게 되었다. 특히 야리가다케의 설산 정상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특별한 감동을 선물할 뿐 아니라 들머리인 가미코치上高地의 울창한 원시림을 걷는 반나절 트레킹 코스는 최고의 힐링코스이기도 하다. 

산행을 마치고 야리사와산장에 도착한 일본산악인들. 헬멧부터 크램폰, 피켈까지 완벽하게 동계산행 장비를 갖추고 있다.
산행을 마치고 야리사와산장에 도착한 일본산악인들. 헬멧부터 크램폰, 피켈까지 완벽하게 동계산행 장비를 갖추고 있다.

가미코치 ~ 도쿠사와(약 6.5km)

북알프스 등반을 위한 들머리는 가미코치. 가미코치 방문자센터까지 가려면 나고야공항을 거쳐서 신시마시마역으로 이동한 다음 버스를 이용해서 가미코치로 갈 수 있다. 

가미코치는 설악산의 설악동 같은 곳이다. 가미코치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졌다.  

오늘의 숙영지는 도쿠사와. 도쿠사와까지는 약 6.5km. 날은 저물고 있지만 등산로가 아니고 편안한 산책로여서 걸을 만하다. 산책로 양옆으론 삼나무, 자작나무 숲이 이어지고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아즈사가와梓川강의 물소리가 경쾌하다. 어느 사이 묘진산장도 지나고 오늘의 숙영지인 도쿠사와이다. 밤이슬을 맞아가며 랜턴 빛에 의지해 텐트를 치고 어둠속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다. 텐트에 몸을 누이고 내일 마주할 설산의 위용을 상상하며 북알프스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한다.  

 가미코치의 고나시다이라 캠핑장.
가미코치의 고나시다이라 캠핑장.

도쿠사와 ~ 야리가다케산장(약 14km)

이른 새벽 새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떠보니 아직은 어두운 새벽. 동이 트길 기다리며 혼자 새소리를 들으면서 침낭 속에서 마음껏 여유를 즐긴다. 오늘 여정은 거리도 길고 체력적으로도 힘든 길이다. 새벽 안개가 자욱한 숲에서 나오는 향긋한 내음이 온 몸을 감싸며 코끝을 간질인다. 신선한 산소를 마음껏 마시고 또 마셨다. 등산로는 원시림 숲속으로 이어졌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눈이다. 지난겨울 내린 눈이 5월에도 녹지 않고 그대로이다. 설산 산행에 목이 말라 이곳까지 왔으니 푹푹 빠지는 눈 속을 걷는 즐거움으로 등에 멘 배낭의 무게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토록 바라던 길이었지만 푹푹 빠지는 눈 속을 헤치며 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런 속도로는 오늘 어둡기 전에 야리가다케산장에는 도저히 도착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산처럼 높지 않고 길이 익숙하다면 야간 산행을 하면서 야리가다케산장까지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3,000m가 넘는 고산지대의 날씨는 무척 변덕스럽고 해가 지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저체온증으로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결국 야리가다케에서 미나미다케로 진행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야리가다케에서 다시 요오코산장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내일 산행에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긴 후에 다른 장비들은 요오코산장에 맡겼다. 배낭에 텐트, 침낭, 매트 등 중요한 장비만 넣으니 무게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야리사와산장까지는 길도 평이하고 조금 가벼워진 배낭 덕분에 걸을 만하다. 스키를 메고 내려오는 스키어들의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저걸 메고 야리가다케 산장을 오르내리는 그들의 열정이 존경스럽다. 점심은 산장에서 매식으로 정했다. 메뉴는 커리. 산장이라고 하지만 식사의 질은 도시에서와 비슷하다.

야리사와산장을 지나니 하산하는 사람들이 모두 크램폰을 신고 내려온다. 앉기 편한 장소를 골라서 크램폰을 신는데 처음이어서인지 쉽게 신어지지 않는다. 산장을 지나서 오름길로 들어서니 제법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처음에는 그저 눈이 좋았는데 쌓이는 눈이 점점 더 많아지고 오르막이 계속되니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엄청난 설산의 위용에 그만 놀란다. 사람이 한갓 점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다녀왔던 안나푸르나, 판시판, 알아르차 등 3,000m 가 넘는 산들의 모습과는 또 다르다. 압도적으로 다른 모습에서 두렵다기보다는 엄청난 에너지를 얻는다. 설국으로 들어섰음이 실감이 난다. 

가지고 온 식수도 바닥이 났는데 갈 길은 멀기만 하다. 가능한 사람이 지나가지 않은 곳의 눈을 파서 소꿉장난 하듯이 얼음과자를 만든다. 한입 베어 먹으니 달콤하고 시원한 설탕아이스크림이다. 한 개 두 개 먹다 보니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눈에 비친 빛 반사로 인해 얼굴은 점점 건조해지고 얼음과자도 먹는 순간만 지나면 입술은 바짝바짝 타기 시작한다. ‘얼굴이 얼마나 탈지?’ 걱정하는 것은 사치. 사서 하는 고생이니 힘들어도 행복하다. 이곳에 오기 위해 기다렸던 시간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 뛰는 순간인가?

체력이 고갈될 것을 우려해서 오늘의 목적지를 야리가다케에서 샷쇼휘테로 변경했다. 야리가다케로 오르기 위해선 60도가 훨씬 넘는 급경사의 눈 쌓인 언덕을 한없이 올라야 하는데 샷쇼휘테는 급경사가 시작되는 위치에 있다. 가야 할 거리가 조금 짧아졌으니 마음도 조금 홀가분하다. 

그런데 오르는 길 저 멀리 보이는 샷쇼휘테는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멀리서 보아서 그런 것이겠지 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샷쇼휘테는 정말로 눈 속에 잠겨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야리가다케산장까지 가야만 한다. 산행시간이 늦어서인지 우리 뒤에는 산을 오르는 등산객도 스키어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텐트도 치고 저녁도 먹을 텐데. 더욱이 너무 늦으면 산장에서 매식조차 어렵다. 한 발 한 발 발을 옮기지만 제자리에서 걷는 기분이다. 

더 이상 발을 내디딜 힘이 없을 때 야리가다케산장에 도착 나도 모르게 “만세”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마치 독립운동 하러 온 사람 같다. 저 멀리서 줄지어 올라오는 이들을 보니 검은 줄로만 보일 뿐이다. 저들이 얼마나 힘들게 걸음을 옮길지 상상한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던 조금 전의 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해가 지는 야리가다케산장 주변을 둘러보며 굽이굽이 뻗어 있는 설산들의 웅장함에 다시 놀란다. 놀라움도 잠시 너무 늦게 도착해서 텐트를 칠 만한 자리 찾기가 참으로 어렵다. 숙영지를 몇 번이나 돌아다닌 끝에 자리를 찾아서 힘들게 텐트를 쳤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저녁식사를 제대로 해야 내일 야리가다케 정상엘 올라갈 수 있다. 랜턴 불빛에 의지해 텐트 안에서 먹는 저녁식사는 비록 건조식이었지만 성찬이다. 

밤이 되자 바람은 성난 파도처럼 나의 텐트를 때리고 플라이와 폴대를 날려버릴 것 같다. 괴성을 내고 달려드는 괴물 같은 바람은 야리가다케계곡까지 뒤흔든다. 이 정도의 날씨가 아침까지 계속된다면 야리가다케 정상은 올라가지도 못할 텐데.

보이지도 않은 야리가다케를 향해서 오르는 길. 오직 앞서 걸어간 이들의 발자국에 의지해 길을 찾을 뿐이다.
보이지도 않은 야리가다케를 향해서 오르는 길. 오직 앞서 걸어간 이들의 발자국에 의지해 길을 찾을 뿐이다.

야리가다케산장 ~ 요오코산장(약 11km)

일출을 보러 야리가다케 정상에 오르기 위해 새벽 4시 기상. 잠시 텐트에서 뒤척이다 나와 보니 벌써 여명이 산 전체에 깔리고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야리가다케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던 마음은 접는다. 사람들의 기다림과 탄성 속에서 뻘겋고 둥그런 해가 두둥실 떠오른다. 올라오는 태양을 보며 작은 소원도 빈다. 고산에서 일출을 맞이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야리가다케 정상이 아니어서 2% 부족함은 있지만 해님과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일출이 끝나자 스키어들이 하강하려고 능선에 도열하고 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한사람씩 멋진 모습으로 발레리나가 춤을 추듯 미끄러져 내려간다. 저 스릴과 쾌감을 맛보려고 그 무거운 스키를 메고 신고 맨몸으로도 힘든 이곳까지 올라온 그들의 열정과 체력에 박수를 보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즐거이 할 수 있다. 나도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눈 속을 헤치며 이곳까지 걸어서 왔으니까.

날이 밝아오면서 세차게 불었던 바람도 잦아든다.  200m 절벽 위의 야리가다케 정상으로 향한다. 직벽에 가까울 만큼 경사도도 엄청나지만 대부분이 암벽이라 상당히 위험하다. 정상 바로 직전은 90도에 가까운 철계단. 한 계단씩 올라설 때마다 온 몸에 전율이 스친다. 

이름 그대로 창처럼 뾰족한 야리가다케 정상은 수십 명이 오르면 자리가 부족할 만큼 비좁고 날카롭다. 정상에는 그 흔한 정상석은 없고 ‘야리가다케’라고 쓴 나무판만이 있을 뿐이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는 바라보기조차 어려울 만큼 까마득하고, 골짜기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이런 모습을 비경이라 해야겠지. 

니시다케에서 야리가다케산장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산객이 걷고 있다.
니시다케에서 야리가다케산장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산객이 걷고 있다.

하산 길은 올라갈 때보다는 조금 수월하지만 눈에 발이 푹푹 빠지니 무척 미끄럽다. 스키어처럼 무언가 타고 내려가면 얼마나 좋을까? 스키어들과 눈썰매 타는 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정상을 밟고 내려와서인지 힘은 들어도 경쾌한 발걸음이다. 그런데 눈이 조금씩 등산화 안으로 들어와 양말이 축축해진다.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라면을 끓였다. 오랜만에 맡는 매콤한 라면 냄새가 향긋했다. 점심식사 동안 젖은 등산화를 햇볕에 말리지만 너무 짧은 시간이라 제대로 마를 리 없다. 축축한 등산화를 신고서 요오코산장으로 향한다.

야리가다케산장에서 내려오는 길만큼 경사도도 심하지 않고 눈의 양도 적어져서 걷기는 조금 수월하지만 녹은 눈 때문에 길이 질퍽거린다. 하늘엔 먹구름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가라사와산장까지 갈 예정이었지만 요오코산장에서 숙영하기로 결정하니 발걸음이 여유롭다. 오를 때 보지 못했던 경치를 아주 느긋하게 즐긴다. 

요오코산장에서 하루 숙박하고 다음날 당일 산행에 필요한 기본장비만 가지고 오쿠호다카다케(3,190m)를 다녀오기로 했지만 요오코산장에 도착하니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끼는 게 아닌가? 북알프스의 아름다운 경치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3,000m를 넘는 고산지대인 탓에 날씨가 좋을 경우 비경을 보여 주지만 맑은 날씨보다는 흐린 날씨가 더 자연스러운 게 고산이었다. 일단은 내일 아침이 돼야 알 수 있는 상황. 예보로 그치길 바라면서 텐트를 친다.  

야리가다케산장에서 보는 일출. 설산과 붉은 태양이 어우러지는 일출 풍광이 환상적이다.
야리가다케산장에서 보는 일출. 설산과 붉은 태양이 어우러지는 일출 풍광이 환상적이다.

요오코산장 ~ 가미코치(약 10km)

어제 밤늦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새 조금씩 내렸다. 새벽 4시 반 조금 지나서 일어나서 4일 만에 처음으로 세수한다. 산에 오면 며칠씩 물티슈로 닦는 것으로 세수를 대신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길도 많이 질퍽거리고 날씨 상황도 좋지 않아서 일행 중 두 사람만 빈 몸으로 가라사와산장을 다녀오기로 했다. 나도 가고 싶지만 나로 인해 다른 분들의 산행에 누를 끼칠 수 있으니 욕심을 누르고 잔류하기로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요오코산장 근처를 산책하면서 비가 더 올 경우 철수를 하기로 했다.

가라사와산장을 다녀온 일행이 돌아오자 가능한 빨리 철수를 시작했다. 비가 더 내리기 전에 가미코치까지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 갈 길이 멀다. 소강상태였던 비가 텐트를 걷고 배낭을 꾸리는데 다시 오기 시작한다.

야리가다케 정상. 그 흔한 정상석은 없고 ‘야리가다케’라고 쓴 나무판만이 있다
야리가다케 정상. 그 흔한 정상석은 없고 ‘야리가다케’라고 쓴 나무판만이 있다

길은 평이해서 그리 힘들지 않게 걷는다. 산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지만 바쁜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 미안해서 그냥 지나쳤는데 가미코치까지 걸어오는 내내 아이스크림이 눈에 밟힌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행복한 모습으로 산행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그중에서도 나의 시선은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 꽤 큰 배낭을 메고서도 다정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준비해 온 식사를 함께 나누어 먹는 모습이다. 나도 저분들 나이가 될 때까지 산에 다니고 싶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진짜 힐링이다.

북알프스 야리가다케
북알프스 야리가다케

어느새 오늘의 숙영지인 가미코치. 비가 더 세차게 오기 전에 잠자리부터 마련해야 한다. 고나시다이라 캠프장에 텐트부터 치고 스파SPA로 향한다. 3,000m가 넘는 고산을 백패킹으로 다녀와서 하는 스파는 달콤함이란 단어로는 충분치 않다. 600엔의 행복. 그동안 흘리고 말리고를 반복했던 엄청난 땀의 흔적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온탕에 들어가서 무한 행복과 성취감에 취한다. 야리가다케 정상에 섰을 때 감격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나도 모르게 “아~ 정말 행복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한다.

저녁시간 내내 일행들과 고기를 구워 먹으며 소소한 자축도 즐기고 이번 산행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함께 좋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 또 행복하다. 이번에 가지 못했던 코스를 밟기 위해 다시 북알프스를 와야 할 명분을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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