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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운명의 촐라체 크레바스가 모든 것을 바꿨다

월간산
  • 입력 2021.06.17 09:42
  • 수정 2021.08.2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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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알피니스트, 아직 살아 있다 <25> 최강식

고향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지리산 영신봉에서 청학동이 있는 삼신봉을 거쳐 불일폭포로 이어지는 남부능선이 지나는 곳이다. 이 삼신봉이 최강식의 고향 뒷산이다. 그의 곁에는 항상 산과 계곡이 있었다. 산은 유년시절 그의 일부였다. 자석에 이끌리듯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산악부에 들었다. 군에 입대할 때 개인정보기록지 취미란에 ‘산행’이라고 썼다. 유격대대로 배치 받고 ‘3보 이상’ 구보를 외치며 26개월간 무장을 수백 번 싸고 수백 번 A텐트를 치고 수백 번 산을 넘었다. 제대 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학 동아리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등반은 최강식 삶의 일부가 되어 갔다.

2013년 UIAA 국제캠프 레니피그 등반.
2013년 UIAA 국제캠프 레니피그 등반.

지리산 품에서 꿈을 키우다

그러던 중 등반 생활에 모멘텀이 찾아왔다. 2002년 한국청소년오지탐사대 인도 가르왈히말라야 탐사대에 가입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히말라야. 산과 장비, 식량, 의료, 행정 등 무수히 많은 것을 공부했고 적응했고 노력하여 얻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기대는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했다. 가르왈 히말라야 탐사는 최강식의 등반 인생에 큰 계기가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쉬블링, 케다르나스 등의 산을 바라보며 무언지 모를 흥분을 느꼈다. “히말라야야! 기다려라. 내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바위에 낙서를 하고 돌아왔다.

인도에서 돌아온 후에도 국내 산행과 등반에 몰입했다. 인도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가슴의 흥분을 오래도록 품을 수 있는 길은 산행과 등반을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히말라야 원정대에 훈련대원으로 참여하겠냐’는 제의가 왔고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 2004년 로체 원정대였다. 영호남 산악인들의 합동대인 이 원정대는 로체 남벽 등반을 위해 결성된 것이었다. 훈련대원으로 참여해 히말라야를 등반했던 선배들 틈에서 원정훈련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쟁쟁한 커리어의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산행하고 등반한 것은 힘들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원하던 남벽이 아닌 서벽 등반팀으로 참가했지만 넉넉지 않은 여건에 짐 수송까지 자체 해결해 가면서 모두 6명이 정상에 올라 성공적으로 원정을 마무리 했다.

2002년 한국청소년 오지탐사대 인도 가르왈 탐사.
2002년 한국청소년 오지탐사대 인도 가르왈 탐사.

등정보다 사람 먼저, 가셔브룸서 배우다

로체 등반을 마치고 카트만두로 내려온 날 한국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가셔브룸 원정대 참가 제안이었다. 네팔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인천을 통해 파키스탄으로 향했다. 가셔브룸 1·2봉 등정이란 목표가 있었지만 최강식을 포함해 6명은 초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을 도울 인력은 부족했다. ‘파키스탄은 노가다’라는 말을 왜 하는지 체감했다. 로체에 이어 한없이 많은 짐들을 캠프로 올리고 또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캠프로 등반하던 중 광활한 가셔브룸 설원에 혼자뿐인 고독과 공포에 휩싸여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있는 자신을 보았다. 이때의 기억은 산을 대하는 최강식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해야 할 것들을 찾아 행동했다. 또한 등정이 우선이 아닌 사람이 우선이 되는 등반을 시작했다. 등정의 실패는 가혹하겠지만 다시 도전할 수 있다. 허나 사람을 잃는 것은 되돌릴 수 없지 않은가.

2004년 가셔브룸2봉 정상.
2004년 가셔브룸2봉 정상.

새로운 인생 열어준 촐라체, 그리고 박정헌

최강식에게 박정헌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인도자였다. 2002년 오지탐사대를 통해서 알게 된 박정헌과는 2003년 로체원정대 훈련대원으로 참여하면서 동행을 시작했다. 박정헌은 히말라야를 알게 해준 리더이자 파트너였던 셈이다.

이후 둘은 운명의 촐라체 북벽으로 향한다. 한국 등반 구조사에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의 시각이었다. 둘만의 등반을 준비하며 등정이 가능할까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었다. 베이스를 구축하고 로부제를 오르고 하산루트를 정찰하는 등 일련의 프로세스를 차곡차곡 이행해 나갔다. 그들은 촐라체를 오르기 시작했고 하루 만에 하산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고 살기 위해 정상을 향한 외길수순을 밟았다. 오르다가 벽에 매달려 자고 얼음을 먹으며 버티고. 그렇게 정상에 선 후 하산길에 크레바스에 빠졌다. 다리는 부러지고 온 몸에 힘은 빠지고 손은 얼어오고 먹을 것도 없었다. 최강식과 박정헌 모두에게 육체적인 시련을 남긴 촐라체는 이들의 등반 이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촐라체는 최강식에게 시련을 주었지만 새롭게 살아갈 길을 제공해 주었다. 촐라체를 오르고 내리며 버텨낸 기억들은 최강식의 몸과 머리에 쐐기처럼 박혔다. 버티고 이겨내고 인내한 경험이 재활을 하게 했고 다시 사회로 인도했다. 찬란한 영광만 가지고 돌아왔더라면 어디선가 차가운 시체로 머물러 있지 않을까? 지금은 예전과 같은 등반은 할 수 없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


나는 아직도 욕망한다

촐라체에 비하면 그의 삶에 끼친 임팩트가 약하지만 의외로 그의 등반과 인생에서 가장 큰 손자국을 남긴 건 가셔브룸이다. 서로를 위해 노력했고 헌신했던 초보 산악인들의 우정, 등정의 욕심으로 점철되는 원정이 아닌 순수하게 산을 동경하며 산을 오르는 휴머니즘이 넘친 이 등반이 그에게는 최고의 등반이었다.

그는 등반 중 고인이 된 산꾼인 윤치원·강연룡을 특히 존경한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궂은 일 마다 않고 허드렛일을 찾아서 하는 등 산악인으로서 후배들에게 반듯한 모범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촐라체 사고 이후 알피니스트로서의 그의 이력은 일단 멈춤 상태다. 그는 이제 산을 동경하고 어떻게 하면 그곳에 갈 수 있을지 찾아보고, 가능한 등반을 만들어 참여해 보고, 새로이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하고 지도하고, 자신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후배들을 안내하는 동반자로 살고자 한다. 하지만 가슴속에는 여전히 7대륙 최고봉과 K2 정상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2014년 촐라체 트레킹.
2014년 촐라체 트레킹.

1980 경남 하동 출생
1998 경상대학교 산악부 입회
2002 한국 청소년오지탐사대 인도 가르왈 탐사대 대원
2004 로체(8,516m) 등정
2004 가셔브룸Ⅱ(8,035m) 남동릉 한국 초등
2004 로부제 동봉(6,119m) 등정
2005 촐라체(6,440m) 북벽 동계 세계 초등
2006 체육포장(산악) 수상
2006 네팔 쿰부 트레킹
2007 일본 북알프스 종주
2008 안나푸르나 라운딩 및 ABC 트레킹
2009 한국 청소년오지탐사대 킬리만자로산군 탐사 부대장
2009 킬리만자로(5,895m) 등정
2009 Mt. 메루(4,566m) 등정
2011 킬리만자로(5,895m) 등정
2013 레닌피크(7,123m) 등반
2014 네팔 쿰부 트레킹
현 진주동중학교 교사

본 기사는 월간산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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