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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지리산에서 ‘뺄셈’과 ‘덧셈’ 지혜를 배우다

이재우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 입력 2021.07.2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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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정상에 오른 필자.
지리산 정상에 오른 필자.

‘엉덩이를 걷어차자!’

등산을 시작하면서 늘 다짐하는 말이다. 당연히 남의 엉덩이는 아니다. 매 주말 ‘내 무거운 엉덩이를 스스로 일으켜 세우자’는 의미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산악회나 지인을 동반하지 않고 나홀로 등산을 즐기는 이른바 ‘혼산족’이다. 사실 ‘혼산’은 무척 어렵다. 게을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애당초 ‘산 따위’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데 ‘남의 일’ 같았던 등산이 ‘내 일’이 되고 말았다. 4년 전쯤, 몸이 많이 좋지 않았다. 나 스스로 이겨내는 처방이 필요했다. ‘의지박약’이랄까. 결정도 쉽지 않았다. 그럴 무렵, 한 일본 산악인의 ‘나는 의지가 약하다.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 자신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몰아 넣는다’는 말이 큰 힘을 줬다. 그는 일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1970년)에 성공한 우에무라 나오미植村直己(1941~1984)다.

엉덩이 떼기가 쉽지 않을 땐 스스로 ‘멱살잡이’라도 해서 끌고 나갔다. 그렇게 조금씩 습관을 붙여 나갔다. 수도권 산들부터 야금야금 올랐다. 자신감이 조금씩 붙더니 ‘간’도 커졌다. 속수무책으로 산에 빠져들면서 작년 여름부터는 지방의 1,000m급 산들을 돌아다니고 있다.

지난 5월 22일 새벽, 나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중산리마을의 한 산장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6시가 되기도 전,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뻐꾸기 소리에 잠을 깼다. 그 소리가 더없이 좋았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았다. 달팽이관을 맴돌며 구슬픈 소리가 귓속에 박혀 들었다.

사실, 이번에 나를 지리산으로 향하게 만든 이는 따로 있었다. 월간<山> 5월호 표지모델 영국인 제임스 후퍼다. 그는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을 하루에 오르는 쓰리피크 챌린지팀을 이끈 탐험가다. 지난 3월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던 나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그 팀의 도전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딱 집으로 배달된 월간<山> 표지 사진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후퍼 팀은 지리산 로타리대피소~천왕봉 구간을 택했는데, 나 역시 가장 ‘빡세다’는 그 코스로 올랐다. 로타리대피소에서 주먹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주말 등산객들이 꽤 많았다. 젊은 커플들부터 외국인들까지. 여기서부터는 심한 급경사 구간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손바닥을 펴서 천천히 주먹을 안으로 말았다.

법계사를 지나 조금 올라가자 듣던 대로 장난이 아니었다. 후퍼 팀 멤버가 TV에서 “지리산엔 왜 ‘악’자가 안 붙었는지 모르겠다”며 “치악산보다 더 힘들었다”고 말한 게 실감이 났다.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도 기어서라도 올라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들숨과 날숨을 친구 삼아 페이스를 유지했다.

조금씩 정상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짧은 호흡과 긴 호흡을 번갈아 해가며 한 발짝 한 발짝 철제 계단을 올라갔다. 마침내 천왕봉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해발 1915m. 표지석 앞 긴 대기 줄이 늘어섰고, 나도 줄을 섰다가 서둘러 인증샷 한 컷을 찍었다. 표지석 뒷면에 새겨진 ‘한국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는 글을 보는 순간 ‘뭔가’가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비운 마음에 여유와 겸손을 채우자!

하산길은 제석봉~장터목대피소~중산리계곡 구간. 상대적으로 완만한 능선이다. 탁 트인 능선과 너무나 맑은 하늘에 나는 취했고 새소리, 바람소리, 계곡 물소리는 그 자체가 ASMR이었다. 모든 걸 품어 준다는 지리산은 나에게 “삶의 무게를 좀 내려 놓으라”고 속삭여 주는 듯했다. 나는 요즘 등산을 하면서 덜어내고, 비우는 ‘뺄셈의 지혜’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중이다.이번 지리산 산행은 좀 특별했다. 뺄셈 이외에 ‘덧셈의 교훈’까지 가르쳐 주었다. 넉넉함, 여유로움, 그리고 겸손함을 더하라는 메시지다.

하산길에 우에무라 나오미를 다시 생각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1984년 2월 12일(그의 43번째 생일이었다) 실종, 산에 묻혔다. 세계 최초로 북미 최고봉 매킨리 동계 단독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길이었다. 하산이 그래서 위험하고 중요하다. 내 경우엔 ‘혼산’인지라 더욱 더 안전 산행이 관건이다.

본 기사는 월간산 7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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