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가 그린 ‘내연삼용추도’ 바로 그곳

입력 2021.07.21 09:29

7월‘ 마운 스토리’포항 내연산
내연산12폭포 중 3곳 담아… 여름 계곡산행으로 안성맞춤, 능선은 둘레길처럼 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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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왼쪽)과 맞은편 천령산 사이 청하골의 깊은 계곡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 C영상미디어
경북 8경 중 으뜸으로 꼽아도 손색없는 포항 내연산 12폭포,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기암괴석.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연이 빚은 폭포와 계곡의 승경勝景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절경 중 절경이다. 겸재 정선이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를 남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겸재는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 풍수화의 새 장르를 개척한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이다. 그가 진경산수화를 그린 장소는 금강산과 더불어 몇 군데 안 된다. 내연산은 그중의 한 곳이다. 그래서 경북의 금강산 혹은 소금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1983년 일찌감치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폭염이 시작되는 7월, 시원한 계곡 따라 내연산 계곡산행을 즐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내연산은 바위 하나 볼 수 없는 전형적인 육산陸産이다. 능선 위로 올라서 걷는 길은 둘레길같이 밋밋하다. 산 초입에 있는 보경사에서 출발해 오른쪽 문수봉 능선으로 올라서서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걷기 편하다. 그런데 내연산과 맞은편 천령산으로 둥글게 연결된 7봉우리는 천혜의 계곡을 만들었다. 그 계곡은 전형적인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절경이다. 능선과 계곡의 지형과 지질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천혜의 계곡이 만든 12폭포는 상생폭포부터 보현~삼보~잠룡~무풍~관음~연산~은폭~복호1~복호2~실폭~시명폭포로 이어진다. 각 폭포마다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한 안내판이 해당 장소마다 나온다. 폭포를 찾아 폭포 설명만 좇다보면 자칫 전체 절경을 놓칠 수 있다. 대개 계곡 산책에 나서는 사람들은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로 남긴 ‘내연삼용추도’에 나오는 연산폭포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연산폭포가 12폭포 중의 백미. 연산폭포 암벽에는 여러 시대를 걸친 숱한 시인 묵객들과 관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내연산을 거쳐 간 기록이나 구전을 남긴 인사로는 1214년 원진국사, 1587년 <유내영산록>을 남긴 황여일, 1623년 유숙, 1688년 <산중일기>를 남긴 정시한, 1733~1734년 겸재 정선, 1754년 이상정, <동국명산기>를 남긴 1800년 전후 성해응 등이다. 방문연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사명대사(1544~1610)도 이곳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가 쓴 보경사 법당 기문에 ‘내연산에는 3개의 거북돌, 3개의 흔들바위, 12개의 폭포, 기화대, 학소대 등이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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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폭포는 원래 여성의 음부를 닮았다 해서 음폭이라 부르다가 ‘용이 숨어 살던 곳’이라 하여 흔히 ‘숨은 용치’라고도 했다. 이후 이에 근거해서 은폭이라 바뀌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 문신 조경趙絅(1586~1669)의 시문집 <용주유고>에도 내연산 폭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칠언율시가 소개된다.
‘깎아 세운 듯 가파른 절벽 만 길 솟아 있고  峭壁削成恒萬丈
벼락 치는 듯 날리는 폭포 천 길 걸려 있네 飛流霆擊挂千尋 
골짜기 입구의 물색은 인간 세상이 아니요 洞門物色非人世
호로 속 누대는 오랜 세월 갇혀 있었네 壺裏樓臺鎖古今 
눈 들어보니 구름이 높게 나는 학 그림자 따르고 抉眥雲隨高鶴影 
연못이 열리자 바람이 늙은 용의 울음소리 보내네 劈潭風送老龍吟 
이번 유람이 천태산을 꿈꾸는 것보다 나으니 茲遊定勝天台夢 
흥공이 땅에 던진 쇠가 도리어 우습구나 顧笑興公擲地金'

내연산 용추를 둘러보는 것이 중국의 흥공이 쓴 <유천태산부>에 나오는 천태산보다 훨씬 낫다는 의미다. 이 정도 절경이라고 예로부터 노래했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개인문집에 내연산의 절경을 노래한 내용들이 지금까지 많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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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향로봉 정상 비석.
종남산→내연산→내영산에서 다시 내연산으로
개인문집뿐만 아니라 관찬 지리지에도 내연산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청하현편에 ‘내영산內迎山, 현의 북쪽 11리에 있다. 산에는 대·중·소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三動石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신라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이 산에서 피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보경사는 ‘내영산內迎山에 있으며, 고려 때 이송로가 지은 원진국사의 비가 있다’고 나온다. <연려실기술>별집 제16권 산천의 형승편에 ‘청하의 내연산內延山은 바위와 폭포의 좋은 경치가 있다. 산에 대·중·소 세 개의 돌솥이 바위 위에 벌여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 개의 돌이라고 일컫는다. (후략)’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한 내용과 비슷하다.
사명대사가 남긴 보경사 법당 기문에는 ‘내연산은 옛날엔 종남산終南山이라 했는데, 뒤에 내연산으로 고쳤다. 고친 때는 신라시대이다.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이 산에서 피한 인연으로 뒷날 사람들이 내연이라 일컬었다. (후략)’는 내용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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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폭포 주변 암벽에는 시대에 걸쳐 방문한 인물들의 이름과 각종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같은 산을 두고 몇 개의 다른 명칭이 등장한다. 애초에는 종남산이라 불렀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내연산과 내영산이 어떻게 명명됐는지 그에 대한 유래를 추적해 보자.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 사명대사가 쓴 기문에 ‘안쪽에서 길게 맞이했다’는 의미로 내연산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내영산은 안쪽에서 환영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두 명칭의 의미 차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다른 명칭이지만 동일한 유래로 볼 수 있다.
문헌에 나타난 명칭의 등장시기는 내연산이 조금 빠른 듯하다. 1680년쯤 제작된 <동여비고>에는 내연산으로 뚜렷이 나타난다. 하지만 1800년대 후반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내영산으로 표시된다. 이어 1900년대 초 일제가 제작한 <조선지지자료>에는 다시 내연산으로 나온다. 이로 비춰볼 때 내연산은 종남산→내연산→내영산으로 불리다가, 혹은 종남산 이후 내영산과 내연산을 혼동해서 사용하다가 다시 내연산으로 통일된 게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겸재 정선(1676~1759)도 1700년 전후해서 태어나 사망한 인물이니 내연산으로 불렀고, 이후 1800년대부터 내영산이 등장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닌 걸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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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내영산으로 표시돼 있다.
계곡 총 길이는 약 14㎞ 달해
지명의 변화는 문헌에 나타난 표기로 짐작할 수 있지만 문제는 지명유래다. 사명대사의 기문에 소개된 이후부터 관찬 지리지나 개인문집 등에 사명대사가 기록한 지명유래를 그대로 따르고 있고,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신라 진평왕이 견훤을 피해 이 산에 들어 내연산이라 했다’는 내용의 진위여부다. 신라 진평왕(?~632)은 신라가 한창 영토를 확장해 가며 순수비를 한반도 곳곳에 건립했던 진흥왕의 손자다. 그도 진흥왕 못지않게 비범한 인물로 왕위를 이어받아 신라의 영토 확장에 일정 역할을 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견훤은 신라 말기 혼란을 틈타 후백제를 건국한 인물이다. 전혀 시대가 맞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내용을 아직까지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일부에서는 이를 인식했는지 진평왕을 신라 말기 진성여왕(?~897)으로 슬쩍 바꾼다. 견훤(867~936)과 시대를 맞추기 위해서다. 진성여왕과 견훤은 일부 시대가 중첩된다. 그렇다면 진성여왕이 경주로 진입한 견훤을 피해 청하로 와서 내연산으로 접어들었다는 내용이 과연 어느 정도 사실일까? 진성여왕이 수도 경주를 버리고 도망해 갔다면 그때가 바로 신라의 패망일일 가능성이 높다. 도성까지 내줬는데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견훤이 경주 외곽을 공격하거나 전라도 광주를 침략한 이후 점령한 사실은 기록에 나오지만 진성여왕이 경주를 버리고 도피한 역사적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진평왕을 진성여왕으로 바꾼 게 과연 타당한지도 따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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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가 1500년대 후반 청하현감으로 있을 때 그린 ‘내연삼용추도’. 세 개의 폭포가 담겨 있다.
사명대사가 진평왕과 진성여왕을 구분하지 못했을까? 진평왕을 그대로 두고 견훤을 다른 인물로, 즉 진평왕과 동시대의 인물로 바꿀 수는 없을까? 내연산이란 지명유래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해도 그 내용의 역사적 타당성에는 상당한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지명에 맞추기 위해서 유래를 가공한 건 아닌지. 500년 전으로 돌아가 사명대사에게 다시 물어볼 일이다. 그렇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의문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현지에서는 아직까지 내연산의 정확한 봉우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내연산12폭포가 있는 청하골은 7봉우리가 에워싼 계곡이다. 무명봉까지 포함하면 여러 봉우리가 더 있다. 현재 내연산과 동일한 능선으로 연결되는 봉우리가 보경사에서 오른쪽으로 문수봉~삼지봉~무명봉에 이어 향로봉까지 계속된다. 향로봉에서 곡선으로 이어진 능선은 다시 맞은편 천령산으로 연결돼 계곡을 품는다. 천령산은 삼지봉과 마주보는 능선이다. 다시 말해 정반대 봉우리인 것이다.
그런데 봉우리에 세워져 있는 정상 비석에는 내연산만 독립적으로 표시된 비석이 하나도 없다. 전부 내연산 문수봉, 내연산 삼지봉, 내연산 향로봉으로 표시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 봉우리들이 전부 내연산인가. 내연산은 지리산과 같이 구체적인 봉우리가 아닌 산맥의 개념이란 말인가? 이러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봉우리의 명칭과 위치를 정하는 국가지리정보원은 삼지봉을 내연산이라 하고 있으나 지역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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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한반도 지명을 정리하기 위해 제작한 <조선지지자료>에 내연산으로 나오고, 이후 내연산으로 통일된 듯하다.
정상 봉우리는 삼지봉으로 알려졌지만…
옛 문헌을 살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후반 168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동여비고>에는 내연산 보경사라고 명확하게 나온다. 이와 함께 표시된 주변 지명은 삼동석 옆에 도리산,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호학산 등이다. 이 당시에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로 강줄기와 같이 표시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내연산 깊은 계곡이 있는 청하골은 아예 없다. 반면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내영산과 삼동석이 표시돼 있으면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이 아래는 신구산(지금의 천령산으로 추정)과 위쪽으로 도리산이 뻗어나가 동해 해안지역에서 끝이 난다. 그리고 내영산에서 뻗어나간 아래 능선과 위쪽 능선 사이에 삼용추 계곡이 표시돼 있으며 지금의 행정구역인 송라면이 끝자락에 나타난다.
당시 지도는 지금과 같이 인공위성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시대가 아닌 순전히 사람의 눈 대중과 걸음으로 추정하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고지도에 나타난 내연산을 유추해 볼 때, 지금의 향로봉이나 삼지봉 위(왼)쪽 무명봉 위치에 해당되지 않나 판단이 된다. 왜냐하면 1600년대와 1800년대 제작된 고지도에 나타난 내연산의 위치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기 일제가 한반도 행정지명을 정리한 <조선지지자료>에도 청하 북면 산과 계곡의 지명에 내연산 보경사, 문수대 보경사, 용추곡 등이 나온다. 문수대는 처음 등장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수봉이나 삼지봉은 근대에 등장한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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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비고>에 내연산 보경사라고 명확하게 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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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소금강전망대에서 맞은편 천령산 선일대와 그 위에 조성한 정자, 그리고 주변 뛰어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옛날에는 봉우리의 개념을 사용했을까 또는 지도에 봉우리를 표시했을까 하는 내용이다. 고지도나 문헌 어디에 찾아봐도 봉우리의 개념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봉우리는 근·현대에 생긴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우리와 같이 산이 많은 나라에서 무수히 많은 봉우리의 명칭을 정하다 보니 봉과 대를 함께 사용하게 된 것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내연산은 지리산과 같이 산맥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정확한 봉우리를 파악할 수 없는 시절에 “저게 내연산”이라고 누가 지정해서 말했겠는가. 두루뭉술하게 가리키면 그 산이 내연산이 되지 않았겠나. 그렇다면 당연히 가장 높은 봉우리인 향로봉이 내연산이 돼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을 지리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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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보경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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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산신 비석.
내연산 등산로는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코스는 내연산 계곡으로 올라가거나 계곡 초입 문수봉으로 올라가서 돌아오는 길이다. ▲주차장에서 보경사 사령고개를 거쳐 문수봉~삼지봉~향로봉까지 갔다가 계곡으로 보경사로 다시 돌아오는 길과 계곡으로 먼저 올랐다가 시명폭포에서 향로봉으로 올라갔다가 능선으로 삼지봉~문수봉을 거쳐 다시 보경사로 원점회귀할 수 있다. 보경사에서 문수봉을 거쳐 능선으로 향로봉까지 총 9.8㎞ 된다. 향로봉에서 계곡으로 내려서서 보경사까지는 총 9㎞ 남짓 된다. 향로봉까지 갔다가 원점회귀하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서 9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보경사에서 내연폭포까지는 편도 2.9㎞ 정도. 왕복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보경사에서 문수봉으로 올라서서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이 내연산 정상이라고 가리키는 삼지봉까지는 총 6㎞. 여기서 미결등 능선으로 음지골을 거쳐 은폭포를 거쳐 하산하는 코스는 7㎞가량. 총 7시간가량 소요된다. 그런데 능선과 계곡 중간쯤 보현암 올라가는 길에서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과 소금강전망대라는 기가 막힌 전망대가 나오는 길로 나뉜다. 소금강전망대는 계곡 절경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경관 포인트이다.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강추’. 소금강전망대를 거쳐 계속 올라가면 연산폭포를 지나친다는 단점이 있다. 연산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소금강전망대 끝지점에서 계곡으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산길을 2㎞ 가까이 내렸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힘들더라도 절경을 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볼 만하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등산과 계곡산행 코스이다.
▲맞은편 천령산(고지도에는 신구산으로 표시돼 있다) 코스는 보경사에서 능선으로 올라서 천령산까지 4.6㎞. 약 3시간 소요 예상. 천령산에서 음지골을 거쳐 은폭포~연산폭포까지는 3.2㎞. 연산폭포에서 보경사까지는 2.9㎞. 따라서 보경사에서 계곡이든 능선이든 천령산 정상을 밟고 원점회귀하는 코스는 총 6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
폭포가 있으면 반드시 소沼가 따른다. 산행 후 소에서 탁족을 즐기는 풍류는 계곡산행을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겸재는 ‘내연삼용추’에 내연산의 관음폭포와 잠룡폭포, 그리고 연산폭포를 심안으로 상상해서 그렸다고 전한다. 과연 그 심안이 얼마나 뛰어난지 아름다운 계곡산행을 실제 즐기면서 그림과 비교해 보면 그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본 기사는 월간산 7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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