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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신영철의 산 이야기]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무대…전설적 열차강도를 만나다

글 신영철 산악문학가 사진 정임수 사진가
  • 입력 2021.07.15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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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천국 유타주…협곡 틈새마다 캐시디의 자취
캐피틀 리프 주립공원 上

워터포켓Water pocket이라는 지구의 붉은 주름이 성벽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24번도로를 차로 달리는 것 자체가 국립공원 관람이다.
워터포켓Water pocket이라는 지구의 붉은 주름이 성벽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24번도로를 차로 달리는 것 자체가 국립공원 관람이다.

“더워지기 전에 한 바퀴 돕시다.”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Capitol Reef National Park에 가자는 정임수 시인의 전화. 코로나 백신 맞으면 복권이나 현금 준다며, ‘묻지 마’ 접종에 열 내는 미국. 백신 구경 못 하는 나라도 많은데, “싫어!”를 외치는 일부 트럼프 지지자와 음모론에 빠진 사람들의 거부.

골치 아픈 미국 정부지만 말 잘 듣는 재미 한국인들은 접종을 거의 마쳤다. 자칭 ‘역마살 인생’이라고 하는 정 시인. 역병 때문에 방콕으로 보낸 시간이 억울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니까. 12번도로 눈부신 풍경이 총 천연색 와이드 화면으로 훅 떠오른다.

“좋지. 갈 때는 24번도로, 올 때는 12번도로를 연결하자고. 길지만 둥글게 도는 게 어때?"

“당연한 말 반복하면 선배는 꼰대소리 듣습니다.”

오랜 여행파트너인 정 시인과는 손발에 생각까지 맞춤이다. 업무분담도 척척. 이번 여정도 2,000km가 넘는다. LA에서 새벽에 출발한 우리는, 낮엔 볼품없는 회색빛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지났다. 이제 목적지까지 반쯤 달린 것. 24번도로와 연결되는 89번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니 해넘이가 시작된다. 우리나라 설악동을 닮은 공원 들머리의 마을 토리Torrey에 캐빈을 예약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인가 하나 없는 해거름 시골 도로가 부담된다.

성채라고 불리는 붉은 사암 절벽은 실제로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처럼 보였다.
성채라고 불리는 붉은 사암 절벽은 실제로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처럼 보였다.

“정 시인, 우리 안전하게 자고 가자. 인터넷 검색해서 가까운 숙소를 찾아봐.”

“전화도 안 터지는 곳인데 인터넷이 연결되겠어요? 이럴 땐 아날로그 종이지도가 최고예요.”

그 말이 맞다. 설악산 대청봉 꼭대기나 땅 속에서도 통화를 할 수 있는 한국은, 미국에서 보면 상상 속의 나라다. 인터넷이 잘 터진다는 도시에서도 그 느림은 완행열차에 버금간다. 이런 오지에서 전화 불통은 당연지사.

지도 덕에 서클빌Circleville이라는 마을을 찾아냈다. 집이 몇 채 있는 서부 촌마을. 다행히 모텔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름이 묘하다. ‘부치 캐시디의 은신처Butch Cassidy’s Hideout’라는 간판. 방을 배정한다는 모텔 옆 카페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묘하다. 유일한 카페인지 동네 백인들 몇 명이 앉아 맥주를 홀짝이다 일제히 우리를 바라본다. 카페 벽엔 섬뜩한 권총과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현상금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한눈에 모르몬교 신도임을 알 수 있는 옷차림의 백인 여자가 우리를 맞는다. 아시안은 처음이라는 눈빛은 그녀도 마찬가지. 방이 모두 11개 있는 작은 모텔이었는데 다행히 빈 방이 있었다. 방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덩치 큰 카우보이 두 명이 신경 쓰인다.

방은 의외로 깨끗했다. 무료 와이파이가 있는데 이건 완행열차가 아니라 숫제 소달구지 속도. 스마트폰은 가능하기에 궁금했던 ‘부치 캐시디’의 정체를 검색했다. 갑자기 아까 카페에서 본 호기심어린 백인들 눈빛이 떠오른 동시에 겁이 덜컥 났다. 부치 캐시디는 아주 흉악한 강도였다. 그러니까 이 동네가 그의 고향이고 모텔이 그가 은신했던 곳이라는 말.

작은 마을인 서클빌의 모텔 겸 카페 벽에 붙은 부치 캐시디의 현상금 포스터. 모텔 상호가 ‘부치 캐시디의 은신처’이며, 실제로 이 마을에 숨었었다고 한다.
작은 마을인 서클빌의 모텔 겸 카페 벽에 붙은 부치 캐시디의 현상금 포스터. 모텔 상호가 ‘부치 캐시디의 은신처’이며, 실제로 이 마을에 숨었었다고 한다.

독실한 모르몬교 신도, 강도가 되다

부치 캐시디는 독실한 모르몬교 가정에서 자랐다. 목장에서 카우보이로 일하다 강도로 직업을 바꾸었고, 1800년대 후반에는 ‘거친 부치The Wild Butch’라는 갱단을 조직해 은행 정도는 성이 차지 않자 열차를 세워 몽땅 터는 떼강도로 갱단을 키웠다. 얼마나 유명했는지 그의 강도행각은 영화로 만들어진다. 유명한 배우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한국 개봉명: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서부영화. 영화는 대박을 터트린다.

“와우! 4,000달러가 현상금으로 걸렸었네요.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죠. 미국 전역에서 총질 잘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신났다네요. 이 동네로 모여 들었지만 부치를 찾을 수 없었대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캐피톨 리프의 복잡한 미로와 협곡에 꼭꼭 숨어서 못 찾았다네요.”

정 시인은 캐시디의 흔적을 찾는 여행을 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신이 났지만, 왠지 불안했다. 요즘 미국에서 횡행하는 아시안 증오 범죄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유 있는 간밤의 불안은 가짜라는 듯 아침부터 햇살이 따갑다.

선사시대의 암각화. 아직 그 뜻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사시대의 암각화. 아직 그 뜻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전처럼 웅장하고 조각처럼 아름다워

다시 전형적인 서부 시골길을 달려 드디어 만남을 고대했던 24번도로를 만났다. 그리고 국립공원이 가까워 온다는 신호가 시작되었다. 풍경이 붉은색으로 바뀌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붉은 사암 절벽층이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눈에 드는 둥근 세상이 온통 붉은색 풍경. 붉은 행성인 화성을 닮았다는 이유로 디즈니 영화 ‘존 카터John Carter’가 이 지역에서 촬영되었단다.

시나브로 높이를 올린 탓에 해발 2,000m가 넘는 고원임에도 고도감이 전혀 없다. 오지인 이곳이 미국에서 가장 깨끗한 공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인지 시야가 툭 트였고, 어안 렌즈처럼 아득한 거리에 서있는 붉은 절벽까지 선명하게 다가온다.

산을 좋아하는 우리는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이곳 유타주 국립공원을 돌았다. 붉은 땅, 붉은 바위, 붉은 산이 너무 좋았으므로. 통하는 부분도 있다. 원주민 인디언 말로 ‘산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을 지닌 유테Ute가 유타Utah주가 되었다니까. 일개 주州지만 면적이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크기다. 그런 땅에 사는 인구는 겨우 320만 명. 부럽기도 하거니와 슬그머니 약이 오른다.

초기 모르몬교도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지었던 오두막. 저렇게 작은 집에서 6명의 식구가 거주했었다고 한다.
초기 모르몬교도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지었던 오두막. 저렇게 작은 집에서 6명의 식구가 거주했었다고 한다.

주민 대부분이 모르몬교도. 그들이 믿는 신神이 복을 내린 것일까. 적은 인구 큰 땅 유타에는 모두 5개의 쟁쟁한 국립공원이 존재한다. 캘리포니아 9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자이언Zion, 브라이스Bryce캐니언, 캐니언랜드Canyonland, 아치스Arches 국립공원. 더불어 우리가 보고 있는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 미국 남서부 웅장한 볼거리를 원형으로 도는, 소위 그랜드 서클Grand Circle이 있다. 지금 언급한 5개 공원이 그중 핵심을 이룬다.

캐피톨 리프는 교통이 불편하다. 거대한 공원을 관통하는 유일한 도로는 24번 하나. 시닉 바이웨이Scenic Byway로 불린다. 공원을 가로지르니 당연히 절경을 양쪽으로 끼고 달리는 도로. 262㎞ 정도의 풍경도로 중 공원을 관통하는 구간이 하이라이트.

24번도로 주변 틈새엔 짧고 긴 무수한 트레일이 존재한다. ‘틈’이란 협곡을 말한다. 강도 캐시디가 숨었다는 협곡들. 당연히 먼 길 달려 온 우리는 가능한 많은 그 ‘틈’ 트레일을 걸을 예정이다. 도로를 끼고 흐르는 프리몬트강Fremont River.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진행형으로 붉은 사암을 깎아 내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강은 여기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독특한 풍광을 창조해 냈다.

사방이 붉은 땅이고 붉은 산이라서인지, 곡선 도로가 흡사
어안렌즈로 보는 것처럼 왜곡되어 보이는 것만 같다.
사방이 붉은 땅이고 붉은 산이라서인지, 곡선 도로가 흡사 어안렌즈로 보는 것처럼 왜곡되어 보이는 것만 같다.

물이 만든 예술과 조형물

과연 물은 위대하다.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을 만든 것도 물. 지구표면이 뒤틀리며 생긴 워터포켓 폴드Waterpocket Fold 습곡 덕분이다. 그랜드캐니언을 만든 것도 콜로라도강. 이 거대한 워터포켓 폴드 표층은 민물바다 파월호수를 통과해 그랜드캐니언 노스림까지 이어지는 아득한 규모다. 이 산에 숨겨진 트레일은 신전처럼 웅장하고 조각처럼 아름답다. 모두 물이 만든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믿어야 한다.

공원 입구에 붉은 기둥 침니바위Chimney Rock가 쓰러질 듯 위태롭게 우뚝 서있다. 이곳은 쉼 없는 풍화작용이 진행되면서 지금도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고 있다. 무릇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멸종된 공룡도 이곳에 살았다. 근처 붉은 사암채석장에서 수백 개의 주라기 시대 공룡 뼈를 채굴했다. 비지터센터 앞에 프리몬트강이 흐르고 있다. 한강의 크기에 비하면 도랑 수준. 하지만 낙숫물이 바위 구멍을 뚫는다고, 수수만년 이 강은 대지大地라는 캔버스에 기막힌 그림과 조각을 만들었다.

붉은색이 아닌 회색빛 돌산도 많다.
붉은색이 아닌 회색빛 돌산도 많다.

동서고금을 통해 확인하듯 길은 거의 물길을 따라 만들어졌다. 24번도로 역시 프리몬트강을 안고 돌며 공원을 잘라내고 있다. 강물이 있기에 화성처럼 붉은 사암 사막에도 사람이 살았다. 강물은 이곳 붉은 사암을 녹이고, 자르고, 갈아, 작은 계곡과 웅장한 계곡까지 무수한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그러므로 시간을 들여 탐험한다면, 이곳에서 몇 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강이 흐르는 저지대엔 무성한 숲이 존재한다. 이 풍경도로 곁엔 원주민 인디언의 암각화와 모르몬교도의 개척문화가 혼재해 있다. 모르몬교도들이 초기에 만든 강가의 학교 등 역사적인 빈 건물도 볼거리. 저렇게 작은 집에서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모르몬교도들이 만든 과수원은 지금도 열매를 맺는다.

암각화와 헷갈리게 바위에 낙서하면 벌금 300달러라는 표지판. 암각화를 보호하려는 경고였을 것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프루이타Fruita라는 유령 마을로 부른다. 사행을 이루고 흐르는 프리몬트강처럼 세상은 돌고 돈다. 암각화를 그리던 원주민을 몰아내고 신천지를 개척했다는 모르몬교도. 이제 그들도 간 곳 없고 프루이타마을은 관광지가 되었다.

수만 년에 걸쳐 이 지역 절경을 만들어 낸 프리몬트강. 기막힌 조형물을 창조해 낸 강의 수량치고는 많지 않다.
수만 년에 걸쳐 이 지역 절경을 만들어 낸 프리몬트강. 기막힌 조형물을 창조해 낸 강의 수량치고는 많지 않다.

자연에서는 발품을 팔아야 비경을 접할 수 있다. 국립공원의 지도가 알려준 15곳의 트레일 가운데 유명한 캐시디 브리지Cassidy Bridge도 그것. 여행 첫날밤부터 우연히 인연이 된 전설적 열차강도 이름의 거대한 자연 돌다리. 꼭꼭 숨은 그것을 찾아내려면 힘들게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곳의 많은 창조물이 지금도 무너지고 있고, 또 새롭게 잉태되고 있다는 공원의 안내. 자연은 시간이라는 오브제를 가공해 미국 국회의사당을 닮은 캐피톨 돔을 만들었다. 문득 아까부터 흐릿하게 머리를 맴돌던 한 가지 생각이 선명해진다.

무릇 모든 게 변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암벽을 도화지 삼아 암각화를 그렸던 선사인도 갔고, 그들을 밀어 냈던 모르몬교도도 도시로 나갔다. 나는 못 느끼지만 눈앞의 붉은 암벽도 변하는 중이다.

내일 만날 대표적인 비경이라는 캐시디 브리지를 봐도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그 또한 언젠가 무너질 자연이니까. ‘열려라, 참깨!’ 같은 중첩된 바위문. 요르단 페트라 입구 붉은 바위절벽이 귀엽다는 그랜드 워시Grand Wash를 만나도 제행무상! 기죽지 말자.

본 기사는 월간산 7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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