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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8월의 섬 자은도] 내 안의 안개 섬, 자은도를 가다

월간산
  • 입력 2021.08.0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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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 섬&산100-8월의 섬 자은도]
안개가 삼킨 몽유도원도 두봉산 5㎞ 암릉 산행

폭우도 폭염도 아닌 날들이었으나, 자은도는 아름다웠다. 하염없이 비우고자 애를 쓰는 썰물의 해변은 채우고자 했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했다. 백길해수욕장 걷기.
폭우도 폭염도 아닌 날들이었으나, 자은도는 아름다웠다. 하염없이 비우고자 애를 쓰는 썰물의 해변은 채우고자 했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했다. 백길해수욕장 걷기.

보이지 않아도 산은 거기 있었다. 엄숙한 순례자의 행렬처럼 안개가 밀려왔다. 폭염이나 폭우를 예상했기에 안개는 의외였다. 완전히 감추지도, 드러내지도 않는 미묘한 풍경이 굴곡진 능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섬인지, 산중인지 가늠할 수 없었으나 불안하지 않았다. 흐릿하게 펼쳐진 대파밭, 포화 속을 헤치고 나오는 거인 같은 풍력발전기, 파도 소리만 울려 퍼지는 백지장 해변, 절벽에서 수줍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원추리 꽃. 안개는 풍경의 원본에 신비를 더해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대표적인 두봉산 산행 기점인 도명사에서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손창건·김민선씨가 배낭 허리끈을 제대로 조인다. 딴 세상으로의 입국인양, 산길은 초록으로 무성하다. 잠깐 방심해 시선을 놓으면 짙은 수풀에 파묻힐 것만 같다. 선두에 선 사람은 덤불과 수풀, 쓰러진 나무, 이슬, 거미줄 제거와 길찾기까지 하느라 바쁘다. 

두봉산斗峰山(363.8m)이라는 이름엔 자은도가 생긴 전설이 담겨 있다. 자은도는 원래 바다 속에 잠겨 있었는데, 한 말(두斗)의 땅덩어리가 솟아났고, 세월이 흘러 바닷물이 줄며 섬이 되고 두봉산이 되었다고 한다. 두봉산 정상 바위에는 조개껍질이 붙어 있어, 이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한다.  

지능선 위에 올라서자 정상부의 훤칠한 바위능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머릿속에서 “짜잔”하는 등장 효과음이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멋있는 암봉이다. 먼 섬까지 온 보람을 느끼며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길 바랐다.

 두봉산은 과할 정도로 짙은 초록 수풀로 입산을 환영해 주었다.
두봉산은 과할 정도로 짙은 초록 수풀로 입산을 환영해 주었다.

소나무, 소사나무, 노간주, 생강나무, 싸리, 졸참나무가 짙은 숲을 이루며 경치를 앗아갔지만, 숲향 가득한 오르막이야말로 고향집 고봉밥 같은 소중한 시간이다. 반갑게 숲을 치고 오르자, 얼마 안 가 놀이동산 같은 암릉길이다. 

철제 난간으로 이은 바윗길, 난간이 없으면 더 자연친화적이고 좋았겠지만 등산객 사고가 잦아 더 세심히 안전에 신경 썼을 지자체의 노력을 감안하면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난간 덕분에 여유롭게 고도감을 즐기며 오른다. 

발품에 비해 경치는 과할 정도로 화려하다. 1004개의 섬이 있어 ‘천사섬’이란 별명을 가진 신안답게 거북이떼 마냥 무수한 섬이 바다에 떠있다. 바다로 옮겨간 무수한 능선은, 곧 바다를 유영하는 첩첩산중이다.

두봉산 정상에 선 김민선씨(우측)와 손창건씨(좌측). BAC 인증지점이다.
두봉산 정상에 선 김민선씨(우측)와 손창건씨(좌측). BAC 인증지점이다.

해무가 삼킨 두봉산 암릉 자체가 작품

바윗길 한 구간 오르면 계산이라도 한 듯 벼랑끝 전망대가 나타나, 숨 돌리고 경치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올해 이화여대 산악부 재학생에서 졸업생이 된 김민선씨는 “바위 빛깔이 완전 예쁘다”며 이런 산은 처음이라는 듯 두봉산의 사소한 것도 신기해했다. 

두봉산은 월출산을 줄여놓은 것마냥 작지만 화려한 바위날개를 갖고 있었다. 불꽃처럼 뜨겁게 솟은 바위 지능선이 섬세하고 힘 있게 날개를 펼쳐, 바다를 향해 뻗어 있었다. 명당에 제대로 자리 잡은 도명사와 마을의 색색깔 지붕, 이국적인 흰색 바람개비(풍력발전기)도 각도를 바꿔가며 황금비율의 경치를 소화하고 있었다.

정상에서 대율재로 이어진 능선의 시원한 바윗길. 몇 발짝 내려설 때마다 경치가 터지는, 산행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정상에서 대율재로 이어진 능선의 시원한 바윗길. 몇 발짝 내려설 때마다 경치가 터지는, 산행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다시 짙은 숲에 들어 잡념을 떨쳐내자 정상이다. 표지석은 의외로 경치 좋은 바윗길 지나 나무가 에워싼 좁은 숲에 있다. BAC 인증사진을 찍고 점심 도시락을 먹는데 빗방울이 흩날린다. 근육질의 보디빌더처럼 몸을 키운 구름은 잽싸게 바다를 숨기고, 맞은편 능선도 반쯤 삼킨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조심스레 산행 후반전에 나선다.    

희미하게 안개가 드리운 산은 몽롱한 한 폭의 동양화였다. 이대로 풍경에 취해 걸으면 취생몽사醉生夢死할 듯싶었다. 가스에 숨겨진 낭떠러지, 허공을 딛지 않도록 주의해 걸으려 했으나 마음은 허공을 걷는 듯 들떠 올랐다. 취한 것도 아니고, 취하지 않은 것도 아닌 채로 허공이 아닌 반허공 속을 걷고 있었다. 

성제봉에서 무인기지국으로 이어진 능선길. 능선은 완만하나 한여름에는 수풀이 짙은 편이다.
성제봉에서 무인기지국으로 이어진 능선길. 능선은 완만하나 한여름에는 수풀이 짙은 편이다.

명나라 장수 두서춘이 도망 온 너그러운 섬 

전망바위라 할 만한 바위벼랑이 여럿 나타났다. 맑은 날이었다면 등산객들이 감탄하며 기념사진을 찍을 만한 곳이지만 여백의 미美 가득한 지금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벼랑 끝에 핀 노란 원추리가 몽유도원도의 끝자락에 느낌표를 찍고 있었다.

웅장하게 가지를 뻗은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 성제봉 능선. 두봉산이 골산이라면 성제봉은 육산 특유의 푸근함이 있다.
웅장하게 가지를 뻗은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 성제봉 능선. 두봉산이 골산이라면 성제봉은 육산 특유의 푸근함이 있다.

언제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지, 언제 마음 놓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지금의 날들이 안개 자욱한 예측할 수 없는 산길과 닮아 있었다. 몽롱한 정신을 현실로 내동댕이 친 건, 마을 이장의 안내 방송이었다. 

낮은 산이라 마이크 소리가 귀에 팍팍 꽂혔다. 흥겨운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오더니, 박자가 넘어 갈 때쯤 “초복을 맞이해 삼계탕용 닭을 마련하였으니 조합원들께서는 지금 오셔서 닭을 받아 가시라”는 내용이었다.

안개가 흘러가는 바위산줄기는 한 폭의 동양화 속인양 편안하고 감미로웠다.
안개가 흘러가는 바위산줄기는 한 폭의 동양화 속인양 편안하고 감미로웠다.

습하고 더운 날씨에 땀에 절어 있던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시에서 겪기 어려운 후덕한 시골 인심이 느껴졌다.

하산 가능한 안부사거리 대율재에서 곧장 직진하자 두봉산의 다른 모습이 다가왔다. 밀림이란 표현이 딱 맞는 짙은 넝쿨 숲이었다. 정상이 골산이라면, 성제봉은 육산이었다. 

초록잎 빽빽한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거친 면모가 방심한 이의 옆구리를 훅 치고 들었다. 성제봉(225m)의 높이만 보고 만만히 여겼다면 후회할 법한 급경사가 들이닥쳤다. 강수는 정수로 받는 법, 같은 속도로 꾸준히 걸어내자 먼저 온 일행이 널브러져 있는 정상 정자였다.

부지런한 주민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은도의 대파밭.
부지런한 주민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은도의 대파밭.

능선을 타고 내려서는 길, 날씨가 개고 있었다. 지도상에 작은 봉우리들이 있어 열린 경치를 기대했으나, 김칫국이었다. 초반엔 길이 나쁘지 않았으나, 정글로 변해 잘 못 온 건 아닌지, 확인차 지도와 GPS를 꺼내게 만들었다. 

송신탑이 있는 봉우리(120m)를 쫓기듯 내려서자 자은초등학교 입구의 구영저수지였다. 하교하는 장난기 있어 보이는 남매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싶었으나, 코로나 시절에 할 행동은 아닌 것 같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면사무소가 있는 자은도의 종로라 할 만한 구영리. 식당과 슈퍼, 숙소가 밀집한 섬 중심가다.
면사무소가 있는 자은도의 종로라 할 만한 구영리. 식당과 슈퍼, 숙소가 밀집한 섬 중심가다.

친절한 자은면사무소 직원의 도움으로 도명사로 돌아와 차를 타고 해변으로 나갔다. 허가 받은 해수욕장만 9곳, 미등록 해변까지 20곳의 해변이 있다는 자은도의 해변이 보고 싶었다. ‘자은’이라는 이름처럼 예쁜 해변을 걸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 두서춘이 반역자로 몰려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이곳으로 도망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인심과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하여 ‘자은慈恩(너그러운 마음)’이란 섬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데크 길이만 1004m에 이르는 무한의 다리. 해변과 할미도를 잇는 독특한 도보전용 다리다.
데크 길이만 1004m에 이르는 무한의 다리. 해변과 할미도를 잇는 독특한 도보전용 다리다.

안개 짙은 해변에 끝없이 파도가 밀려들었다. 중등산화 끈을 풀어헤쳐 맨발로 걸었다. 온통 안개 속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건강에 대한 염려와 생계의 위협 같은 불안한 시간 속에 움츠러들었던 사내가 보였다. 

파도소리가 우여곡절 많았던 할매 육자배기마냥 따뜻하게 몸을 휘감고, 부드러운 모래 촉감이 열을 식혀 주었다. 살다가 도망치고 싶을 때, 자은의 안개가 생각날 것 같았다. 

천사대교
천사대교

섬 가이드

자은도는 해수욕장만 9곳이 있는 최적의 바캉스 산행지다. 지난해 11km에 이르는 천사대교 개통으로 배를 탈 필요가 없어 접근이 훨씬 편리해졌다. 두봉산 산행은 도명사에서 시작해 정상에 올랐다가 대율재에서 하산하거나, 성제봉과 무선기지국을 거쳐 구영저수지로 내려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제봉과 무선기지국이 있는 120m봉은 나무가 높아 경치가 없으므로 짧은 산행을 원한다면 대율재에서 곧장 하산하는 것이 낫다. 

여름에는 수풀이나 가시덤불이 있어 반바지를 입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능선이 단순해 진행 방향만 기억하면, 길 찾기는 크게 어렵지 않다. 정상이 가까워 올수록 고도감 있는 바윗길이 늘어나지만 철제 난간이 있어 초보자도 주의하면 어렵지 않다.

도명사 앞에 차량 3~4대를 세울 공간이 있다. 길이 좁아 버스는 진입이 어렵다. 도명사에서 정상까지 1.1km, 정상에서 대율재까지 1.3km, 대율재에서 성제봉까지 800m, 성제봉에서 기지국까지 900m, 여기서 저수지까지 700m이다. 총 4.8km이며 3~4시간 정도 걸린다. 자가용 회수를 위해 돌아갈 경우 저수지에서 도명사까지 1.9km이다. 

BAC 인증지점 두봉산 정상석 좌표 34.886046, 126.063976

교통  목포버스터미널과 신안 자은도를 잇는 1004번 버스가 하루 9회(06:30, 08:40, 09:30, 10:00, 13:30, 15:00, 15:30, 18:00, 19:20) 운행한다. 신안군청이 있는 압해도와 암태도를 거쳐 자은도에 이르며, 자은면사무소 소재지를 거쳐 분계해변에서 회차해 목포로 돌아간다. 분계에서 목포행 1일 8회(06:30, 07:50, 10:40, 12:40, 13:20, 15:50, 17:30, 18:10) 운행. 문의 자은 개인택시 061-271-5554.

맛집 BAC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조

등산 지도 특별부록 지도 참조

본 기사는 월간산 8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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