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1959년, 도봉산 만장봉에서 하강 교습

  • 사진·글 <산의 기억>에서 발췌 재편집. 김근원 촬영, 아들 김상훈 구술 정리.
    입력 2021.09.23 10:06 | 수정 2021.09.23 10:35

    <1> 1959년 하강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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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도봉산 만장봉에서 학생들에게 하강을 가르치는 김정태 선생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사진가 김근원 선생의 유고 산악사진집 <산의 기억(열화당)>의 일부 사진을 발췌해 소개한다. 김근원 선생(1922~2000)이 남긴 30만 점의 사진 중에서 아들 김상훈씨가 386점을 엄선해 <산의 기억>에 담았다. 1950년대부터 담아낸 사진은 산악계의 소중한 유산이자 걸작들이다. 본지는 출판사 열화당과 김상훈씨의 허락을 받아 연재를 시작한다.
    김정태 선생은 산악인으로서 손색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상식이 풍부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예술적 감각도 소유한 참 멋진 사나이였다. 산 노래를 부르며 풍류를 즐길 줄 알았고,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며 경험담을 토로할 때는 모두 진지하게 경청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목소리가 낭랑하고 기억력도 좋아 나 역시 그의 언변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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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태 선생.
    그렇게 멋진 산사나이였지만 경제적 소탈함은 단점이 되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를 폄하했던 것은 그의 경제적 실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내가 김정태 선생을 만났던 초기만 해도 살림살이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교보빌딩 근처에 살았는데, 서울 한복판 그것도 광화문 네거리에 집이 있을 정도면 여유 있는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집이 도시계획으로 수용되면서부터 생겨났다. 당시 도시계획으로 집이 수용되면 보상은 형식적이었고 그냥 내쫓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졸지에 집을 잃은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그때 많은 산악인들이 그분을 도왔다.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돕게 되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서울시에서 김정태 선생의 공로를 높게 사 문화상을 수여했다. 산악인도 이렇게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국산악회원들 모두 내 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본 기사는 월간산 9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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