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자일이 안 당겨져요”… 뙤약볕에 식은땀 흘리다

  • 글·사진 안중원 성균관대 산악부
    입력 2021.09.13 09:39

    Pitch by Pitch <8> 성균관대 산악부 설악 등반기
    ‘경원대길’ 하강 중 자일 꼬이는 사고…임기응변 등강으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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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대길’ 8피치를 오르고 있는 상준이. 원지가 빌레이를 보고 있었다.
    ‘Pitch by Pitch’는 한 피치 한 피치 앳된 오름짓을 이어가는 대학산악부원들의 진솔하고 톡톡 튀는 목소리를 담은 연재다. 이번 호에서는 성균관대 산악부의 하계 설악산 경원대길 등반을 다룬다. 필자는 성균관대 산악부 재학생 회장 안중원이며, 이외 참가자는 같은 학교 산악부 소속인 문상준, 신원지다. - 편집자 주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밤 12시, 산악부실의 불빛은 여전히 창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도착한 부원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제 장비를 챙기고 출발 준비를 해야 할 시간. 이제 출발하자고 지시하자 모두들 바삐 야영장비와 멀티피치 등반장비를 챙긴다. 카라비너가 뭔지 자일이 뭔지 일일이 설명해 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말 한마디에 알아서 장비를 챙기는 후배들이 참으로 대견하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저 자리에서 주장 형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지시를 내려야 한다.
    이번 산행은 여름방학 첫 산행이기도 하고 주장으로 부임한 후 기획하고 진행하는 첫 산행이기에 산악부로서나 개인적으로나 의미가 컸다. 종강기념 산행으로 설악산을 가기로 한 것은 예전에 보았던 KBS 프로그램 ‘영생앨범 산’에서 소개한 설악산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편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설악산 등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설악산 등반 참석인원은 총 7명으로 3명과 4명 두 팀으로 쪼개어 나를 포함한 3명 팀은 소토왕골 경원대길로, 4명 팀(변승재, 김호준, 강우영, 김윤영)은 장수대 몽유도원도로 가기로 했다. 우리 팀원 중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모두 신입생임을 고려했을 때 적절한 선택인 것 같았다.
    동이 틀 무렵 설악산 소공원에 도착해 등반장비를 가방에 챙기고 본격적으로 어프로치를 시작했다. 경원대길을 가기 위해서는 등산로를 벗어나 출입금지 표지판을 뛰어넘어 비룡폭포 상단 물길을 가로질러야 한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암장 이용 안내판이 나오고 ‘경원대길’이라고 쓰인 표시를 따라 오르면 경원대길 초입에 다다른다. 출입금지 표지판을 걸어두고, 막상 그 표지판을 넘어가면 암장 이용 안내문이 나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길이 험하고 잃기 쉬워서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출입금지 표지판을 걸어두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만 이 출입금지 표지판을 넘나들을 때마다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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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피치 종료 후 7피치 시작지점으로 이동 중 모습.
    겁없는 후배들 “별로 안 무서워요”
    어프로치를 끝내고 경원대길 1피치 시작점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길고 험했던 어프로치에 지친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우리보다 먼저 온 팀이 있어서 그분들이 출발할 때까지 대기해야 했기에 충분한 휴식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앞팀은 50대로 보이는 혼성팀이었는데, 서로 닉네임으로 부르는 것을 보니 인터넷 산악회에서 오신 것 같았다.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대학산악부”라고 답하니, “젊은 학생들이 참 보기 좋다, 너무 부럽다”며 “똑같은 장비와 무전기인데도 더 세련되고 멋있어 보인다”고 했다. 새삼 나에게 주어진 20대라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지금 함께하는 친구들과의 인연이 감사했고 꾸준히 산을 타면서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자연 속에서 즐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원대길은 경원대학교 산악부가 1996년 개척한 코스다. 난이도는 최고 5.9, 평균 5.6으로 비교적 어렵지 않다. 등반난이도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수평으로 이동하는 구간이 많아 후등자 확보가 효율적이지 않고, 칼날과 같은 능선 위를 등반하기 때문에 고도감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부담이 크다.
    하지만 후배들은 겁도 없이 바짝바짝 잘만 따라왔다.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저 아래 골짜기로 떨어질 수 있는데 무섭지 않느냐”고 물으니 대수롭지 않게 “별로 무섭지 않다”고 한다. 대단한 담력이다. 후등으로 따라오면서 능숙하게 설치된 캠을 회수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후등빌레이 설치를 하는 모습에서 그동안 인수봉에서 쌓은 내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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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프로치 중 보인 토왕골의 토왕성폭포. 깎아지른 절벽이 요세미티를 보는 듯하다. 겨울에는 폭포가 얼어 빙벽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6피치를 마치고 1봉에 오르니 설악산 토왕골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의 노적봉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고, 속초시의 건물들과 동해바다의 수평선이 저 멀리 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리지길이 병풍처럼 눈앞에 서 있었다. 감상에 젖을 새도 잠시, 쨍하게 내리쬐는 강한 햇빛에 모두 타들어갈 것 같았다. 앞에 9피치 그늘에서 쉬고 있는 팀이 너무 부러웠다. 우리도 빠르게 이동해 그늘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이제 마지막 피치인 11피치까지 두 번만 더 가면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뜨면서도 11피치에는 마땅한 하강 포인트가 없어서 다시 9피치로 돌아와 하강해야 한다는 점이 걱정되었다.
    마지막 10피치와 11피치는 뾰족뾰족하고 얇은 병풍 같은 바위로 이루어진 피너클Pinnacles(작고 뾰족한 암탑) 구간이다. 두 다리 아래로 쭉 뻗은 계곡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되돌아온다. 계곡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해서 고도감과 맞물려 서늘한 느낌까지 든다. 등반 중간에 침니 구간이 하나 있는데 편하게 오르려면 침니 위로 몸을 올려 스테밍하며 등반해야 할 것 같지만 높은 고도감에 겁이 나서 침니 사이로 몸을 쑤셔 넣고 비비면서 올랐다.
    드디어 11피치 정상에 도착했다.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10피치 방향으로 하강 준비를 한다. 막내에게 자일 회수를 맡기고 나는 10피치에서 9피치로 하강하는 줄을 미리 깔아둘 요령으로 자일 한 동을 챙기고 먼저 하강했다. 그렇게 9피치까지 하강을 완료하고 후배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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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영장에서 캠프파이어. 왼쪽 문상준, 오른쪽은 전 주장이었던 김호준.
    “형 자일이 안 당겨져요”
    11피치 하강 후 자일을 회수하던 중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갖고 있는 등반 지식과 경험만으로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 주마를 챙겨왔기에 이를 사용해 보기로 했다. 인수봉에서 연습 삼아 이용해 보긴 했지만 실전에 적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배운 대로 차근차근 등강 시스템을 설치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조금 오르니 금방 적응해서 등강에 속도가 붙었다. 등반으로 오를 때보다 훨씬 편했다.
    이렇게 문제의 11피치 시작점에 도착했다. 후배들에게 먼저 9피치로 하강해 대기하고 있으라 하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아직 자일이 하강 고리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디 바위 틈새에 끼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후배가 자일이 꼬인 상태로 하강했고, 자일을 회수하려고 당겼을 때 꼬인 부분이 하강 고리에 걸려서 당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선등으로 11피치를 오르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해 주마를 이용해서 등강하기로 했다.
    다만 이 자일은 하강 고리를 통과하고 있을 뿐, 확실하게 매듭지어져 있지 않은 자일이므로 한쪽 줄만 당길 경우 추락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양손 주마를 자일 양쪽에 연동하고 동시에 두 주마를 당겨 자일이 한쪽으로 풀리지 않도록 하면서 올랐다. 이러한 등강법은 전에 배운 적 없었지만 물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기존 시스템을 응용해 임기응변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더블 로프 어센딩double rope ascending’이라는 등강법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없이 등강을 마치고 11피치 끝자락에 다다르니 꽈배기처럼 꼬인 자일이 보였다. 내 예상대로였다. 이렇게 나는 하루에 경원대길 정상을 두 번 찍고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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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원대길’ 11피치 정상에서 찍은 단체사진. 왼쪽부터 문상준, 신원지, 안중원.
    “기특하다”며 용돈 챙겨 주신 선배님
    자일이 꼬인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우리밖에 없었던 9피치 하강포인트에 다른 팀이 먼저 하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앞팀이 하강하기를 기다리는데 그들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대학산악부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답하자 본인도 대학산악부 출신이라 너무 반갑다며, “지금 대장은 누구냐”, “몇 명이 왔냐”, “YB만 왔냐” 등 질문을 쏟아냈다. 말끝마다 느껴지는 반가움이 정겨워 답하다가 문득 그 선배는 “용돈을 주겠다”며 내게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몇 차례 사양했으나 그는 “대학생 시절 산에서 처음 만난 대학산악부 선배한테 용돈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선배가 자기에게 갚지 말고 커서 후배들에게 물려주라고 했다. 그 날이 오늘인 것 같다”고 했다. 그 인연이 수십 년의 세월을 관통해 이어진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은혜를 갚을 때까지 산악부를 그만두지 못할 것 같다. 박영채 선배님, 감사합니다.
    본 기사는 월간산 9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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