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자연 영화] 법 모르는 아이 셋 싱글맘, 골리앗 기업에 짱돌 들다

  • 글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입력 2021.09.30 10:12 | 수정 2021.09.30 10:20

    <14> 에린 브로코비치

    40~50대 중장년층의 청춘 시절을 심쿵하게 만들었던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의 맥 라이언, ‘사랑과 영혼’(1990)의 데미 무어,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의 르네 젤위거는 각각 새침함, 청순미, 엉뚱함 등을 발휘하며 젊은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줄리아 로버츠이다. ‘프리티 우먼’(1990)으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사랑을 위하여’(1991), ‘펠리컨 브리프’(1993),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1996) 등 로맨스, 서스펜스, 뮤지컬 같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들의 호응을 불러냈다.
    그녀의 인기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1997)과 ‘노팅 힐’(1999)에서 절정을 이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얼굴이 알려진 여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커다란 입의 시원한 미소로 미국 피플지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여성’에 총 5회(1991, 2000, 2005, 2010, 2017)나 선정됐으며, 여전히 미국에서 ‘아메리칸 스윗하트American sweetheart’의 대명사로 꼽히는 줄리아 로버츠의 ‘연기자’로서의 최고작으로 필자는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2000)를 꼽는다.
    줄리아 로버츠를 위한 영화
    워낙 세계적 흥행에 성공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많아 ‘가벼운 로맨스 전문 배우’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자 그녀는 실화를 바탕으로 진지한 주제를 담은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에 적극 참여했고, 그녀의 배우 인생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 줬다.
    이 영화는 흥행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여배우 원톱 드라마’ 장르임에도 미국 본토와 세계 곳곳에서 흥행에 성공했고,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물론 골든 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전미 비평가협회상, 미국 배우조합상 등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0~2000년대 할리우드를 휩쓴 톱스타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를 거쳐 ‘맨 이즈 백’(2018)까지 30여 년째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이지만 아카데미상 수상은 ‘에린 브로코비치’가 유일한 작품이다.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는 솔직하고 당당한 여성이다. 두 번 이혼을 하고, 8세 매튜, 6세 케이티와 이제 생후 9개월 된 베스를 혼자 키우고 있다. 빚이 있고 은행 잔고도 떨어져 당장 일을 구해야 하는 상태다. 학벌도 없고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에 전념하느라 별다른 경력도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한 상대의 과실 100%인 사고였는데, 자신을 담당한 변호사 에드 마스리(앨버트 피니)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돈을 뜯어내려는 목적”으로 몰아붙인 상대 변호사에 말려들어 법정에서 “저 미친놈이 날 들이받았다니까” 같은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보상금을 한 푼도 받아내지 못한다.
    생계가 막막해진 그녀는 에드를 찾아가 거의 떼를 쓰다시피 일자리를 간청하고, 만약 일처리가 미숙하면 언제든 해고한다는 조건으로 소규모 법률회사에서 사무 보조 일을 시작한다. 다른 직원들은 거친 입과 요란한 옷차림의 에린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시기에 옆집에 바이크 폭주족의 인상을 풍기는 조지(아론 에크하트)가 이사를 온다. 수차례 이혼을 겪은 에린은 조지의 호감 표명에 벽을 치지만, 어느 날 그녀가 없는 동안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있는 조지의 모습에 마음을 열고, 그에게 베이비시터 일을 맡긴다.
    1992년 부동산 구매 제안서 파일 정리 일을 하던 에린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부동산 관련 서류에 혈액 샘플과 병원 진료 기록들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에린은 해당 장소인 힝클리 지역을 찾아가 주민들을 직접 만나 그 이유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들에 따르면 애초 집을 팔 의사가 없는 주민들에게 인근에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전력 대기업 PG&E에서 찾아와 좋은 조건에 집을 구매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 주민들의 의료비를 PG&E에서 부담하고 있었다.
    에린이 힝클리 지역 수도국 자료까지 뒤져가며 알아낸 바 PG&E의 공장에서 유출하는 크롬 성분이 토지에 스며들고 수질을 오염시켜 암과 백혈병 등 각종 질병을 마을주민들에게 발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에린은 “달걀로 바위 깨뜨리기”라는 에드를 설득해 마을주민 600여 명의 고소인 서명을 받아낸 후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다.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스티븐 소더버그는 첫 장편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로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스타 감독이다. ‘트래픽’(2000), ‘오션스 일레븐’(2001), ‘오션스 트웰브’(2004), ‘컨테이전’(2011) 등 흥행작을 만든 명장이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실존했던 한 여성이 주인공이자 작품의 뼈대[骨]이고 살[肉]인 영화다. 추격 · 총격신 같은 액션이 전무하고, 스릴러나 서스펜스적인 요소도 없으며 베드신도 없는 이 영화가 2시간 10분이라는 짧지 않은 상영시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건 대부분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다. 그 까닭에 이 영화는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남우조연상(앨버트 피니) 등 주요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는 이의 심장 한구석을 움찔하게 만들고 뇌리에 긴 여운을 남기는 건 오롯이 줄리아 로버츠의 연기 덕분이다. 로스쿨을 나온 법률 전문가 집단 사이에서 짧은 치마와 가슴이 드러나는 차림으로 자연스레 욕설을 날리지만, 대기업의 기만과 술수에 쓰러져가고 있는 지역 주민들과 진심으로 교감하는 모습을 어느 배우도 줄리아 로버츠보다 더 핍진하게 그려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美 사상최대 3억3,000만 달러 배상 승소
    28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거대 기업 PG&E를 상대로 하는 까닭에 규모가 작은 에드 변호사 사무실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자 다른 대형 로펌과 함께 소송을 진행하게 된다. 그쪽 변호사들이 “자료가 전반적으로 부실하다. 어떻게 면담 자료에 전화번호 같은 기본 사항이 빠져 있냐?”고 한심스러워하자 에린은 “누구 전화번호가 궁금하냐?”면서 634명 고소인의 전화번호와 가족관계, 구성원별 질병 내용, 최근 가정 대소사 등을 메모조차 보지 않은 채 줄줄이 꿴다.
    관객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 장면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딱 적절한 만큼의 표정과 몸짓으로 에린 브로코비치의 캐릭터를 인상적으로 연기한다.
    결국 4년 후 PG&E는 미국 법정사상 최고액인 3억3,300만 달러를 힝클리 주민들에게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에린 또한 규모가 훨씬 커진 로펌의 정식 직원 자리를 얻고 성공보수로 200만 달러를 손에 넣는다.
    이 영화는 도덕성을 상실한 기업의 이윤추구와 환경오염 행위가 얼마나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려는 한 캐릭터가 상대의 힘과 규모에 주눅 들지 않고 인간애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가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사회의 개혁이 일개인의 노력으로도 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9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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