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김기섭] 자유롭게 활자 속을 등반하는 詩人

입력 2021.11.26 09:41

[People] 시집 <달빛 등반> 펴낸 산악인 김기섭

시집 1쇄가 완판되었으나 베스트셀러 시인보다는 ‘베스트셀러 개척자’에 가깝다. 바위꾼들 사이에서 인기 코스로 통하는 바윗길 상당수를 김기섭(60)씨가 개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악우회에 가입했으며, 1982년 경원대 산악부를 창립한 그는 설악산 노적봉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백운대 ‘시인 신동엽길’, 토왕골 ‘경원대 리지길’, 도봉산 자운봉 ‘배추흰나비의 추억’, 진도 ‘동석산 리지’, 제주 중문암장 ‘어느 모델의 하루’, 설악산 만경대 ‘별길’, 설악산 ‘몽유도원도’, 북한산 노적봉 ‘즐거운 편지’처럼 주옥같은 바윗길을 개척했다. 이밖에도 그가 1980년대부터 2006년까지 개척한 바윗길은 숱하게 많다.
첫 시집인 <달빛 등반>은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문학평론가 임우기 선생은 “산과 숲과 바위의 그윽한 향이 시에 가득하다”며 “깊은 고통의 세월을 거치지 않고는 낳기 힘든 시, 삶의 의미를 넘어 삶의 여백을 낳는 시”라 평했다. 신동엽문학관장인 김형수 시인은 “대지의 맨살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서정을 발화시킨다”며 “공통된 거시적 작동 방식을 읽는 듯한 감동과 매혹을 준다”고 극찬했다.
산악인이 쓴 아마추어 시詩가 아닌, 수준 높은 시라는 것. 실제로 그의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가슴 깊이 스며든다. 잠시 그의 시 일부를 감상하자. 
‘서서히 풀리는 / 산안개 따라 아침가리골로 들어간다. / 겨우내 버림받은 바람 / 복수초 봉오리를 틔우고 / 숲은 먼 생애로부터 흘러들어 온 / 전설만큼이나 간명하다.’ -‘방태산 아침가리골’ 부분
‘그해 여름, 우리는 내린천으로 어둠이 몇 겹 무게로 떨어질 적마다 돌을 주워 모아 케른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밤하늘 별들이, 수천수만 반딧불이 쏟아지고 할 말도 잊은 채 강물 위로 유성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내린천 여름밤과 송준호’ 부분
‘발톱이 빠져버린 사랑이 있었네 / 한여름이 다 가도록  / 별들은 노래 부르지 않았고 / 강물은 흐르길 거부했네 / 배롱나무 아래 애인 있었네 /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비가 내려 / 생을 접기라도 하듯 / 꽃잎 떨어져 / 빗소리에 스며든 여자 있었네’  -‘배롱나무’ 부분
굳이 의미를 해석하지 않아도, 그냥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 아름다움이 번져온다. 신동엽시인 관련 행사에서 30여 년 만에 ‘시인 신동엽길’ 개척자인 김기섭씨와 만난 신동엽문학관 김형수 관장이 그에게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면 보여 달라”고 해 시집 출간이 이뤄졌다. 김형수 시인의 추천으로 시집전문 출판사인 솔 출판사에서 시의 깊이를 인정해 시집으로 펴냈다.
인터뷰를 하고자 만난 자리에 그는 휠체어를 타고 왔다. 2006년 11월 인수봉 인수B 코스에서 20m 추락으로 경추 두 군데가 골절되었는데, 팔과 다리가 마비된 것. 확보자를 원망할 법도 하지만, 그는 “제가 좋아서 등반하다 그리된 건데요. 부정해 봤자 아무 의미 없어요”라고 말하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걸을 수 없고, 팔도 조금 드는 정도만 가능해 옆에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체장애 1급이며 간병인이 24시간 교대로 보살핀다. 나라에서 나오는 최소한의 장애인 지원금으로 생활하는 팍팍한 살림임을 감안하면, 마음이 어두울 법도 하지만 그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의 시집은 1쇄 700부가 완판됐고 2쇄를 찍어 냈다. ‘베스트셀러 개척자’에서 ‘베스트셀러 시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인 셈. 몸은 휠체어에 묶여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자유등반을 하고 있는 김기섭 시인이다.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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