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사찰] 요새 같은 험산… 조선의 정신을 지킨 절

입력 2021.11.10 09:40 | 수정 2021.11.10 09:47

무주 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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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본 안국사 극락전. 1613년 안국사를 중수할 때 건립됐다.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달리다 무주톨게이트를 지날 때쯤 홀연 거대한 암벽을 두른 산이 그랜드캐니언처럼 버티고 서있다. 주위 산군과 너무나 판이한 모습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산은 적상산赤裳山(1,030.6m)이다. 가을 단풍이 산을 물들이면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사면이 곧추 선 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깎여 마치 치마를 두른 것 같아 그 이름이니, 옛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사서 성으로 삼았다. 두 갈래 길이 겨우 위로 열리지만,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시냇물이 사방에서 솟아난다. 참으로 천연의 요새라…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근방 고을에 쳐들어왔을 때도 백성들이 모두 이곳에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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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적상산. 단풍이 절정일 때면 산허리를 빨갛게 물들인다고 해서 적상산이다.
산허리까지 험준, 정상은 평탄
정확한 묘사다. 산허리까지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험준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상은 평탄하고 육산이라 숲이 매우 울창한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상 부근은 수백 년 된 참나무 군락지다.
적상산은 덕유산 주능선에서 살짝 떨어져 있지만 엄연히 덕유산국립공원에 포함돼 있다. 850~1,000m 봉우리들이 도열해 있지만 무주 지역은 고원지대여서 산에 오를 때 그다지 높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산행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산 서쪽 사천리 서창마을에서 장도바위·서문터 쪽으로 올라 향로봉 삼거리에서 능선길을 만난 뒤, 향로봉(1,029m)을 거쳐 안렴대에서 전망을 즐기고 안국사安國寺 방향으로 하산하는 2시간 30분짜리 코스가 가장 일반적인 산행로다. 어린 자녀나 어르신과 동행했다면 산의 8·9부 능선까지 차량으로 오를 수 있는 안국사 쪽 코스를 이용하는 것을 권한다. 안국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단풍철엔 산정호수 주차장에 주차) 200여 m 나무계단길을 걸어오르면 산 능선과 만난다. 참나무 울창한 능선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향로봉까지 1.5km. 왼쪽으로 완만한 숲길을 따라 300m쯤 가면 안렴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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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정상 부분에 자리잡은 적상호. 양수발전을 위해 조성된 인공호수다.
버스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절
서창마을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유서 깊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바로 그 두 갈래 길 중 하나다. 평범해 보이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산길이다. 적상산 산길은 어느 코스든 참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걷고 쉬기에 좋다. 멀리서 적상산을 보면 무척 힘든 산행이 될 것 같지만 지그재그로 길이 이어지면서 완만하게 고도를 높이기 때문에 까다롭지 않다. 
오름길에서 큰 바위 하나가 길을 막고 선다. 장도바위다. 고려 최영 장군이 바위에 막혀 산을 오를 수 없게 되자 검長刀을 뽑아 힘껏 내리쳐 바위를 쪼개 길을 냈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바위를 지나 조금 오르면 고려 말에 축성됐다는 적상산성(사적 146호). 한때 석축 둘레가 8km, 높이는 2m를 넘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산성이라기엔 위압적이지 않고 나지막하다. 
무주 안국사는 우리나라에서 버스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찰로 해발 1,000m에 위치해 있다. 고려 충렬왕 3년(1277년)에 월인화상이 창건하고, 조선 초 무학대사가 삼재가 들지 않는 땅이라며 중창한 안국사는 광해군 6년(1614년)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위한 사고史庫 지킴이 사찰로 지정된다. 난공불락 요새 같은 곳에 절을 짓고 중창한 이유는 외적으로부터 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묘향산에서 조선왕조실록 가져와 보관 
적상산에서 조망이 가장 빼어난 곳은 안국사에서 500m 떨어진 안렴대다. 안국사 해우소 쪽으로 난 부드러운 길을 따라 10분가량 걸으면 닿는다. 안렴대는 산 남서쪽 절벽에 있는 수직 절벽 위의 암석 지대로 사방이 낭떠러지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 고려시대 지방장관인 안렴사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피신해 난을 피했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사고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겼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빼놓고 안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절 이름에서부터 나라를 지켜온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만주에 후금後金이 일어나 북쪽 국경이 불안해지자 조정에서는 묘향산 사고를 옮기자는 논의가 일어난다. 이에 인조 12년인 1634년부터 시작, 1641년에 적성산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실록을 보호하는 수호사찰 호국사가 지어졌고 이를 지킬 수호대를 조직했다. 이 모든 일을 담당한 이들은 승군僧軍이었다. 스님들은 사고가 옮겨오기 전부터 승군을 조직하고 성을 쌓고 사고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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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으로 촬영한 안국사 올라가는 길.
관리는 줄행랑, 스님들이 사고 지켜
묘향산에서 적상산으로 사고를 옮긴 표면적인 이유는 후금의 위협이었지만 실제로는 사고 관리를 맡은 관리들의 업무 태만 때문이었다. 인조 때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동부승지는 이렇게 적었다 
‘묘향산 사고가 병란 이후 승려 한 사람만이 수직하고 있을 뿐이어서 적변이 없더라도 실록이 분실되기가 쉬우므로,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 보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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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사 연혁에 대해 설명하는 이규평 종무실장.
후금이 쳐들어오는 등 국경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정작 사고 수호 책임을 맡았던 말단 관리들은 모두 도망가고 스님 한 명만 남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적상산 안국사로 실록이 옮겨진 후에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재연된다. 청나라 군대가 무주 깊숙한 곳까지 출몰하자 실록을 지키던 관리들은 또다시 줄행랑을 쳤다. 스님들만 남아 안국사 뒤 안렴대에 실록을 숨기고 지켰다. 1643년 대제학 이식은 임금에게 이렇게 고한다.  
“적상산성에 청병이 들자 2~3명의 승僧만이 있었고 그나마 흩어져 도망하려 할 때 한 노승이 사고를 버리지 못하여 실록을 석굴 속에 감추어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노승이 승병장 상훈스님이다. 
왕이 아니라 성현이 다스리는 이상적 국가라고 자부하던 조선 왕실의 상징 ‘실록’에 들이는 정성과 관심에 비해 보존과 수호는 터무니없이 허술했다. 억불과 숭유를 국시로 내건 조선에서 왕조실록을 지켜낸 이들은 가장 탄압받던 승려들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산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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