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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3월호
  • 653호

[나홀로 걷기 한라산] 로또에 당첨된 날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 입력 2022.01.1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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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과 흰 구름을 발아래 두고 한라산 눈꽃 트레킹

바람의 방향으로 얼어붙은 눈얼음 사이로 장엄한 위용을 드러낸 한라산 백록담.
바람의 방향으로 얼어붙은 눈얼음 사이로 장엄한 위용을 드러낸 한라산 백록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가고 싶어 하는 한라산. 겨울산의 온갖 매력을 가지고 있는 한라산의 겨울은 중독성이 강하다. 눈꽃으로 가득한 한라산을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은 그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렵다. 특히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백록담 분화구에 엉겨 붙은 상고대는 조물주의 예술작품이다. 멀리서 보면 백록담은 마치 씨실과 날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하얀 고깔모자를 쓴 듯하다. 

해발고도 1,947m, 2만 년 전에 용암이 분출하면서 생긴 한라산은 백두산, 금강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산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1,800여 종의 식물이 살고 있다. 봄의 철쭉과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이 유명하다. 특히 해발고도 1,300m 이상의 구상나무 숲에서 볼 수 있는 겨울 상고대는 탐방객들을 즐겁게 한다. 

주말을 이용해 한라산을 오르려고 어렵사리 탐방예약까지 해놓은 터였다. 잠시 지인을 만나러 간 자리에 한라산 산행을 다녀온 제주 현지인이 동석했다.

“이틀 후에 한라산 등산 예정인데 한라산의 눈은 어느 정도 남아 있나요?”

대답 대신 휴대폰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 사진은 유럽 알프스에서 보았던 눈보다 더 많은 눈으로 뒤덮인 겨울왕국의 모습이었다. 무조건 내일 한라산에 오르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하얀 눈꽃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한라산에서 눈을 밟아 본 지가 언제인지? 서울에서 눈 예보에 맞춰서 제주에 와도 번번이 입산금지이거나 눈이 많이 녹은 후였다.

“모레까지 눈이 남아 있을까요?”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내일 가요.”

“아이젠은 꼭 가져가야 합니다.”

눈꽃나무 터널에서 한라산의 겨울을 만끽하고 있는 탐방객.
눈꽃나무 터널에서 한라산의 겨울을 만끽하고 있는 탐방객.

어리목~영실코스는 예약이 필요 없어서 제주도민들은 탐방예약이 필요한 백록담코스는 즐겨가지 않는다고 했다. 연속 이틀 한라산? 고민할 여지없이 결론이 났다. 숙소로 돌아와 다음날 어리목~영실코스 산행을 준비했다.

같은 숙소에 머무는 두 총각이 동반하기로 했다. 산에 그다지 많이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열정 하나만은 대단했다. 조금 무모하긴 했지만 정상을 오르는 길이 아니니 함께 길을 걷기로 했다. 눈이 많아서 길이 미끄럽거나 얼어서 위험한 경우에는 무조건 하산하기로 단단히 약속 받았다. 

새벽부터 현석씨가 토스트를 맛나게 구워서 포장했다. 오늘의 점심이었다. 첫차를 타고 조금 여유 있게 다녀오려고 버스 정류장까지 뛰었다. 뛰는 과정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온병 물이 쏟아져 현석씨 카메라에 스며들었다. 주인의 마음은 타들어갈 텐데 적절한 위로의 말도 건네기 어려웠다.

첫차 도착 시간이 되었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조금 늦게 도착하려나? 기다렸지만 깜깜 무소식. 전광판에 보여야 할 도착예정 버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동계시즌 운행하지 않음’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동계시즌엔 첫차 운행 시간이 늦어진다). 버스정류장에서 세 사람이 한 시간째 앉아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처럼. 기다림의 시간 동안 어제 처음 만난 우리들은 애써 서먹함을 지우려고 말을 나누다 보니 조금씩 친해졌다.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어리목 도착. 버스에 탔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차했다. 동행은 아니지만 마치 함께 온 일행처럼 자연스럽게 어리목 탐방지원센터를 향해 걸었다. 길가의 나무들은 아직 단풍 옷을 벗지 않고 있었는데 벌써 산행을 끝내고 나오는 사람들 손에는 누구랄 것 없이 대부분 아이젠이 들려 있었다.

오전 8시 25분 어리목탐방지원센터 도착. 윗세오름까지는 4.7km. 어리목탐방지원센터를 지나니 바로 조릿대 밭. 한라산에 왔음이 실감났다. 한라산 곳곳에 남아 있는 단풍들을 바라보니 눈이 가득한 한라산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리목 목교를 1km 지나니 해발 1,200m. 드디어 눈이 보이기 시작했고, 해발 1,400m가 되니 눈이 제법 많아졌다. 먼저 올라간 누군가 만들어놓은 눈사람 가족이 쉼터의자에서 놀고 있다가 나를 보고 방실 웃었다. 가느다란 풀잎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나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봄에는 철쭉으로 만발하는 사제비동산에 이르니 눈이 가득했다. ‘뽀드득 뽀드득’ 이 소리를 듣고 싶었어. 아이처럼 신이 나서 눈을 밟으며 이리저리 뛰는 나를 보고 동반한 두 총각이 비시시 웃기만 했다. 그때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시는 분들을 포착했다. 그분들은 어리목대피소 공사현장에 일하러 가시는 분들이었다. “아~ 나도 타고 싶다!” 설국의 세상을 오가는 모노레일은 마치 산타클로스가 탄 전동차 같았다. 설국을 달리는 기분은 어떨까?

천상의 정원이라 불리는 선작지왓의 대평원에도 눈이 가득하다.
천상의 정원이라 불리는 선작지왓의 대평원에도 눈이 가득하다.

히말라야보다 더 멋진 설경

만세동산전망대 도착. 드디어 백록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고깔을 쓴 백록담 모습에 가슴이 멍해졌다. 설국이 따로 없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이런 장대한 풍광을 마주하는지.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거의 없으니 눈을 즐기는 데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사진 찍는 손도 시리지 않고 눈 속에 있는 발도 시리지 않았다.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잠시 쉬면서 하얀 고깔 쓴 백록담을 바라보면서 새벽에 현석씨가 만든 토스트를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토스트였다. 이것만으로도 한라산에 온 이유가 충분했다.

해발고도 1,700m 윗세오름. 로또 당첨된 사람처럼 흥분됐다. 참 운도 좋다. 어떻게 이런 때에 제주에 왔을까. 오늘 처음 한라산에 온 두 총각은 제대로 신이 났다. 이렇게 멋진 모습을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려나. 내가 만난 최고의 한라산이었다.  발걸음이 춤을 추었다. 눈이 가득 쌓인 알프스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부신 은빛 세상에 등산객은 점으로 표시되었다.

한라산 1700고지에 펼쳐진 구름은 산과 하나 되어 더욱 신비로웠다. 하얀 눈꽃 세상과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은 더욱 강렬하게 대비가 되었다. 백록담 바로 아래에 펼쳐진 구상나무 군락지는 무수히 많은 크리스마스트리로 가득했다. 윗세오름까지만 가려던 계획은 자연스럽게 백록담 남벽 분기점으로 바뀌었다.

눈향나무 군락지로 들어와 보니 이곳은 별천치 세상이었다. 눈향나무 가지에 쌓인 눈과 바람이 만든 조각품들로 가득했다. 바람의 힘으로 얼어붙은 눈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휘어지고 틀어지면서 얼어붙어 참으로 진기한 모습을 연출했다. 눈향나무는 해발 1,400~1,950m에 분포하며 바람을 피해서 지면 가까이 최대한 키를 낮추고 살아가는 키 작은 나무이다. 눈 터널 속을 걸을 때면 바람이 불어 온 몸으로 눈을 맞았다. 내 곁에 늘어진 나뭇가지엔 눈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눈길을 어디에 주어야 할지 몰랐다. 수없이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번이라도 이 길을 왔다 갔다 하고 싶었다. 히말라야에서도 이렇게 멋진 설산은 본 적이 없었다. 몇 해 전부터 눈으로 가득한 한라산을 오르지 못해서 마음속 깊이 쌓여 있던 실망감을 오늘 단 한 번에 날려주었다.

백록담 남벽 분기점으로 가까이 갈수록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백록담 분화구에 엉겨붙어 있는 눈들은 신의 작품이었다.

눈길을 걸으며 백록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 운해가 펼쳐졌다. 한라산을 많이 올랐지만 이런 운해는 처음이었다. 하얀 눈과 하얀 운해가 맞닿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두 총각은 이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운해 앞에서 두 팔 벌려 그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최대한 깊게 숨을 쉬면서 이곳 한라산의 모든 기운을 내 몸으로 들였다. 조금 더 남벽 쪽으로 내려서니 점점 운해 속으로 들어갔다.

눈으로 둘러쌓인 만세동산에 있는 해발 1,600m 표지석.
눈으로 둘러쌓인 만세동산에 있는 해발 1,600m 표지석.

남벽 분기점 앞에서 다시 윗세오름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하산은 영실코스. 윗세족은오름전망대에 올라 늠름하게 앉아 있는 백록담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작별인사를 했다. 영실코스의 눈들은 이미 많이 녹아 있어서 조금 미끄럽기는 했지만 어리목코스보다는 한결 쉬웠다. 선작지왓, 병풍바위, 오백나한상을 거쳐서 안전하게 하산했다. 

어제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른 새벽부터 다시 백록담을 향했다. 오늘의 동행은 자전거를 함께 타는 지인. 40년 만에 한라산을 밟는다며 흥분했다. 어리목~영실코스에 비하면 난이도도 있고 거리도 길어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서 새벽 6시 관음사탐방지원센터를 출발했다. 아직 세상은 고요하고 어둠에 싸여 있다. 

언제나 성판악에서 출발해 사라오름을 경유해서 백록담을 올랐다가 관음사로 내려왔는데 이번엔 성판악 예약을 하지 못한 관계로 관음사에서 출발했다. 시작길이 조금 지루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지만 어둠속에서 걷는 길이라 생각보다 편하게 산행을 이어갔다.

어제와 같은 그런 멋진 한라산을 볼 수 있을까? 삼각봉대피소에 이르니 백록담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어제만큼은 화려한 설경이 아니어서 은근 신경이 쓰였다.

용진각 다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제법 경사가 심해졌다. 두터운 눈옷을 입은 구상나무 군락지는 지나가는 등산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구상나무가 만든 눈 터널에선 모두 사진을 찍느라 부산했다. 물론 나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 어제의 설경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제 그 멋진 설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엄청나게 흥분했을 텐데. 

만세동산에서 윗세오름으로 향하는 탐방객들이 하얀 고깔을 쓴 백록담을 마주보고 걷고 있다.
만세동산에서 윗세오름으로 향하는 탐방객들이 하얀 고깔을 쓴 백록담을 마주보고 걷고 있다.

백색의 세상에서 설멍을 즐기다

백록담 바로 아래 전망대에 이르니 비로소 숨 막히게 멋진 설경이 펼쳐졌다. 고사목은 바람이 온갖 마술로 만들어 놓은 조각품 전시장이었다. 구상나무 잎사귀에는 얼어붙은 상고대가 마치 구슬처럼 붙어 있었다. 눈꽃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백록담에 도착하니 하얀 산 아래로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도 없었다. 두 발로 오르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광이었다. 고생이 있어서 더욱 큰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이틀 연속 이렇게 다채로운 멋진 설경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게다가 백록담이 바로 곁에 있으니 바쁠 것도 없었다. 천천히 느긋하게 설국을 바라보았다. 세상조차 숨을 죽이고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백록담에 도착하니 예상한 대로 사람들이 엄청났다. 백록담에 가득 쌓여 있을 줄 알았던 눈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래도 눈 덮인 백록담을 보았으니 행운이었다. 정상석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으려던 마음은 애써 태연하게 거두었다. 그 길고 긴 줄에서 내 차례를 기다릴 인내력이 부족했다. 정상석에서 조금 떨어져서 셀카모드로 정상 인증사진을 남기고 햇살 잘 드는 데크에 자리를 잡았다.

김밥 한 줄이 오늘의 점심. 간소하지만 맛났다. 식사 후에는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오수를 만끽했다. 그토록 원하던 한라산의 눈을 즐기고 눈부시도록 화사한 태양을 만끽하고 있는 나는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였다. 세상에 이런 사치가 어디 있을까?

내가 애정하는 사라오름을 들르기 위해 조금 서둘렀다.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길은 수분기가 적당히 있는 눈길이라 꽤 미끄러웠다. 모두들 아이젠을 신고 걸었지만 나는 스틱에 의존해서 균형을 잡았다. 뾰족한 아이젠으로 산을 밟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위험하다 싶은 구간에는 줄이 잘 매어 있어서 한 손은 줄을 잡고 내려가니 한결 하산길이 편했다. 성판악코스는 관음사코스에 비해서 눈이 많이 녹아 있어서 구간에 따라선 질퍽거리기도 했다. 아마 오전보다 눈이 더욱 많이 녹았을 것이다. 설경을 기대하고 올라오는 발걸음이 실망감이 가득할 수도 있겠다.

한라산 탐방예약을 하면서 성판악을 예약하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관음사로 예약한 나를 칭찬하고 또 칭찬했다. 

진달래밭대피소를 지나서 사라오름으로 향했다. 인적도 드물고 백록담을 바라보며 산행을 마무리하기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드론을 날려보려고 배낭에 넣어왔건만 한라산은 전체가 드론비행금지구역이었다. 아쉽지만 마음을 접고 백록담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느긋하게 햇살 따스한 오후를 즐겼다. 이젠 그저 내리막길. 눈도 녹았으니 걱정할 길도 아니었다. 단지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어제, 오늘 이틀에 걸쳐 눈부시도록 찬란한 한라산 설경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속밭대피소에서 조금 쉬고 다시 하산을 재촉했다. 조릿대가 가득한 길을 지나 삼나무와  소나무가 가득한 속밭을 통과해서 성판악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이틀간의 한라산 산행을 마무리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칠 한라산 등정 인증서도 오늘은 특별히 받았다. 내 인생 최대의 눈꽃잔치를 즐겼으니 아주 오랫동안 한라산의 겨울을 추억하고 싶었다. 작은 이벤트를 만들어서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이틀간에 40여 km를 걸었음에도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안녕 한라산!

안녕 제주! 

한라산 눈꽃 트레킹 준비물과 주의사항

●겨울철 한라산 산행을 계획한다면 눈 소식에 관계없이 아이젠, 스패츠, 스틱은 안전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한라산은 결코 낮은 산이 아니어서 일기변화가 심하므로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날 수 있다.

●겨울철 한라산 산행은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므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와 열량이 높은 간식, 그리고 충분한 식수를 준비한다.

●지치기 전에 적절하게 휴식을 취한다.

●겨울철엔 기온차가 심하므로 보온에 각별히 신경 쓴다. 얇은 옷을 여러 겹 껴입으면 체온조절이 더욱 쉽다.

●일조시간이 짧으므로 가능한 오전 일찍 산행을 시작하고 일몰 2시간 전에는 산행을 마무리한다.  

●겨울 산행은 환경과 날씨로 인한 사건 사고가 많이 발생하므로 특별히 안전산행을 한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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