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세의 산정무한] 산길 걷다 道를 깨달은 인오 스님 자취 찾아

입력 2022.04.27 09:58

삼정산 ‘칠암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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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대에서 영원사로 가는 길 위에서. 저 멀리 눈덮인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지난 3월 9일, 제20대 대통령선거 투표를 마친 뒤 아내와 함께 지리산 산행을 위해 함양군 마천면 양정리 영원사 오름길로 승용차를 이용해 이동했다.
올해 들어 스물세 번째인 이번 산행의 목적지는 지리산 주능선에서 북쪽으로 쭉 힘차게 뻗은 삼정산의 8부 능선을 가로지르는 ‘칠암자 길’이다. 일곱 암자가 깃들어 있는 삼정산(1,261m)은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전후해 수많은 순례객이 줄지어 산행하며 절을 방문하는 ‘순례 코스 등산’으로 이름난 곳이다. 
삼정산의 높이는 지도상에 해발 1,182m, 1,225m, 1,261m 세 가지로 표기되어 있다. 정상에서 한참 내려와서 자리한 상무주암의 고도가 해발 1,181m, 1,150m로 표기되고, 상무주암 부근 바윗길에 세워놓은 국립공원 이정표에 해발 1,154m로 표기된 것을 감안하면 삼정산 높이는 1,261m가 정확하리라 판단된다. 
해발 1,000m에 있는 일곱 암자 거쳐
해발 1,200m 지점의 도솔암을 필두로 영원사-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약수암-실상사로 이어지는 등산코스는 비단 절을 참배하기 위해 순례길에 오르는 불교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 등산객들에게도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등산코스로 알려져 찾는 이가 적지 않다.
오후 1시 39분 무주대無住臺의 상무주암으로 가는 들머리에서 출발해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쉬며, 쉬며 봄의 정취에 취해 1시간 남짓 산길을 걸어 암자에 도착했다. 때마침 절 마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스님들 세 분과 눈길이 마주쳐 서로 가벼운 눈인사를 나눴다.
암자 마당에 들어서니 힘찬 글씨로 ‘上無住’라고 쓴 편액이 보이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圓光원광’은 글쓴이의 법호로서, 근세의 선사禪師로 유명한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스님을 지칭한다. 절 마당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지리산 주능선에 우뚝 솟은 반야봉이 마치 산등성이 위로 솟아오른 둥근 보름달처럼 다가온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수많은 지자智者, 이인異人, 도인道人들이 깃들어 살면서 삶의 숱한 애환을 노래하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으며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민족의 영산靈山으로서 시공時空을 초월해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지리산에 깃들어 살았던 이들 가운데 특별한 자취를 남긴 대표적인 인물은 조선 중기의 청허 휴정淸虛 休靜(1520~1604) 선사이다. ‘서산西山대사’라는 별호로 더 잘 알려진 선사는 성균관, 즉 요즘의 일류대학 재학생 신분의 프리미엄을 하루아침에 포기하고 지리산 깊은 산속에서 학업과 수도修道에 전념해 마침내 과거科擧급제 대신 ‘심공心空급제’한 훌륭한 도인이다.

경봉 스님 자취 어린 상무주암
임진왜란 당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 산문 밖으로 나와 전국 각 사찰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승군을 조직해 왜병을 물리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수행 및 교화와 관련해 주옥같은 글들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또한 유명하다.
서산대사의 제자로서, 지리산 남쪽 기슭의 연곡사를 위시해 북쪽 삼정산 중턱의 영원사, 도솔암 등지에 머물면서 수행·교화와 관련해 수많은 일화를 남긴 청매 인오靑梅印悟(1548~1623) 스님은 “마음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불경佛經을 읽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心不返照看經無益”라는 요지의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지어 불법佛法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삼정산에서 내려와 마천을 거쳐 등구마을, 촉동마을을 지나 삼봉산과 법화산을 잇는 능선 고개를 넘어 함양장터까지 150여 리 길을 하루 해거름에 왕래하다가 어느 날, 고갯마루에서 불도佛道를 크게 깨달았으며, 그 뒤로 그 고개를 ‘오도재悟道峙’로 부르게 한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 <청매집>에는 그가 쓰거나 읊은 글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지리산 10대 중 하나인 ‘머무름 없는 대無住臺’라는 제목의 글은 아마도 지리산 내 삼정산 무주대에 자리한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읊은 것으로 추정된다. 심산 고대高臺에 좌정해 참선에 몰두하는 선승禪僧의 심경이 잘 드러나 보이는 시이다.
땔나무 해오고 물 길어 오는 일 외엔 하는 일 없네
‘참 나’ 찾아 현묘한 도리 참구에 힘쓸 뿐
날마다 변함없이 소나무 밑에 앉았노라면
동녘 하늘의 아침 해가 어느덧 서산에 걸려 있네
般柴運水野情慵반시운수야정용 
參究玄關性自空참구현관성자공
日就萬年松下坐일취만년송하좌 
到東天日掛西峯도동천일괘서봉
세속 버리고 지리산에 든 서산대사
상무주암을 떠나 영원사로 이어지는 산길에 들어서니 지리산의 장대한 능선을 비롯해 기이한 바위와 절벽이 눈앞에 펼쳐지고 벼랑 꼭대기에 오르자 온갖 풍상을 견디며 고고한 자태로 선정禪定에 든 벽송碧松을 만난다. 
지리산 하봉 와불산臥佛山 자락의 벽송사碧松寺를 중심으로 영원사, 도솔암, 상무주암 등 명승지의 절과 절을 잇는 산길은 서산대사를 비롯해 그의 스승 부용 영관, 제자인 청매 인오 선사 등 기라성 같은 도인들이 언제나 걸으면서도 참선 수행을 하는 ‘행선行禪의 도량道場’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옛 도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무념무상의 선정에 들어 해발 1,000여 m 고도의 산길을 걸어 빗기재에 도달하니 상무주암으로부터 온 길은 1km이고 영원사까지의 갈 길은 0.8km 거리라는 푯말이 보인다. 영원사를 지나 경내의 청매 선사 부도와 근자에 입적한 대일 스님의 부도를 지나 설파 상언雪坡尙彦(1707~1791) 대사를 비롯해 영암靈巖, 중봉中峯, 청계淸溪, 벽허碧虛 모두 5기의 부도를 안치한 ‘영원사 승탑군’의 부도를 참배한 후 상무주암 들머리 원점으로 회귀했다.
이날의 봄나들이는 총거리 4.41km, 소요 시간 4시간 남짓, 고저 809~1,182m를, 선정에 들어 오르내리며 만물이 약동하는 봄날의 생기生氣를 듬뿍 받은 즐거운 산행이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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