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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그때 그 산] 장 보고 온 엄마·아빠 위해 나무스키로 길 터준 아이들

故 김근원
  • 입력 2023.01.31 06:40
  • 수정 2023.02.17 11:01
  • 사진(제공) : 故 김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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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흘리

장날 생필품을 구하러 원통에 다녀오는 흘리 주민들. 이고 지고 들고 오는 맨 앞에 어떤 아이가 스키로 길을 터주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 흘리. 1972. 2.
장날 생필품을 구하러 원통에 다녀오는 흘리 주민들. 이고 지고 들고 오는 맨 앞에 어떤 아이가 스키로 길을 터주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 흘리. 1972. 2.

백두대간 종주는 바로 이곳 진부령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가고 싶어도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흘리는 백두대간 마지막 마을이 되었다. 흘리마을은 늘 날씨가 흐려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행정구역상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에 속해 있지만 생활권은 원통이나 인제와 가까워 실제 장이 열리면 원통 장을 이용했다.

내가 처음 갔을 때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버스가 비좁아 겨우 탈 수 있었다. 이미 백담산장에서 며칠을 보낸 나는 윤두선과 함께 용대리에서 느긋하게 진부령까지 가면 된다는 말에 별 걱정 없이 버스를 기다렸는데, 막상 버스 안은 장을 마치고 들어가는 흘리마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진부령 정상에서 버스를 내렸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장을 보고 들어오는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가 보따리라도 받아들려고 한 것이다. 흘리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저마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들고 발목까지 빠지는 눈을 밟았다. 맨 앞의 아이는 스키를 타고 러셀이라도 하듯 길을 터주고, 사람들은 그 아이의 스키 자국을 보며 따라갔다.

이윽고 40여 채의 초가집과 함석집이 옹기종기 모여든 흘리마을에 당도했다.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 산과 개울의 구분도 없고, 어디까지 밭이고 산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눈 세상이었다. 눈 마을이라는 표현은 무색하기만 했고, 어떤 수식을 갖다 붙여야 적절할지 나 자신이 옹색했다. 설국雪國이라는 어느 독립된 나라, 비록 가난하고 초라하지만 눈만큼은 풍족한 나라에 입성했다고나 할 성싶었다.

다음날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데 모두들 스키를 이용해 등교하는 것이었다. 만약 스키를 갖고 가지 않았다가 공부가 끝날 시간에 큰 눈이라도 만나면 보통 고생이 아니라는 것이 아이들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그야말로 설국의 환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그 자체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사진가 김근원 선생의 유고 산악사진집 <산의 기억(열화당)>의 일부 사진을 발췌해 소개한다. 김근원 선생(1922~2000)이 남긴 30만 점의 사진 중에서 아들 김상훈씨가 386점을 엄선해 <산의 기억>에 담았다. 1950년대부터 담아낸 사진은 산악계의 소중한 유산이자 걸작이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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