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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인구 7,000명 시골을 100만 명이 찾게 만든 ‘링컨 연설’

정영훈 외대산악부OB·재미대한산악연맹 워싱턴D.C
  • 입력 2024.01.30 07:40
  • 수정 2024.02.0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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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의 격전지를 걷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1) 게티즈버그

격전지 중 하나인 데빌스 덴.
격전지 중 하나인 데빌스 덴.

펜실베이니아는 미국 건국 이래 종교의 자유가 가장 많이 주어진 곳이다. 이로 인해 현대 미국을 상징하는 ‘다양성’이 바로 이곳에서 발원했다. 3회에 걸쳐 펜실베이니아 곳곳을 돌아보며 미국이 현재의 저력을 갖출 수 있었던 비결을 확인해 본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링컨의 명언. 이 말을 했던 장소의 이름을 딴 ‘게티즈버그 연설’이라 불린다. 그래서 어디에 있고, 어떤 곳인지도 모르지만 게티즈버그라는 지명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다.

게티즈버그는 블루리지산맥 북쪽 끝자락의 작은 산골 마을이다. 인구수가 7,00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펜실베이니아 남쪽이며 도시와 한참 떨어질 정도로 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1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온다. 미국 남북전쟁의 최대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게티즈버그를 중심으로 약 30만 평의 평원이 전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전쟁 당시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160년 전 그때 격돌한 남북 군인들의 고함과 비명, 그리고 링컨의 연설의 메아리를 품은 언덕, 돌, 나무, 풀이 그대로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람의 손이 간 것은 격전지를 알리는 표지석과 참전부대를 기념하는 조형물들뿐이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공원을 걷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 이곳의 역사 하이킹을 완주하려면 적어도 며칠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7개 이상의 잘 알려진 하이킹 코스가 있으며 긴 것은 9시간 이상 걷기도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여행이다. 게티즈버그 여행은 남북전쟁을 알면 그 즐거움이 배가된다. 1863년, 남북전쟁이 시작된 지 3년째 되는 해로 가보자. 먼저 1861년 2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가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3월, 16대 대통령이 된 링컨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4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반란군으로부터 연방 재산을 몰수하다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4년 동안 결말이 나지 않았던 남북전쟁의 시작이었다.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기념 흉상.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기념 흉상.

게티즈버그가 전장된 이유 ‘군화’

북부 사람들은 전쟁이 쉽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북부 인구는 2,200만 명, 남부는 겨우 900만 명이었다. 북부는 총기와 군수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반면 남부는 총포와 군수물자를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 수입해야만 했다. 심지어 본토 해안은 북군 해군에 의해 포위된 상태였다. 뉴욕의 공업규모가 남부 전체를 합친 것보다 2배 넘게 컸으니 북부는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과 달리 전개되었다. 전쟁 초기부터 남군이 전투에서 계속 승리했다. 남군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승기를 잡고 공세를 이어가고자 했다. 목표는 북군의 수도 워싱턴D.C 위쪽에 있는 필라델피아와 볼티모어. 그렇게 되면 그동안 미온적 태도를 보이던 유럽 국가들이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연합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 줄 것이 확실했다.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얻는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자신이 있었다.

1863년 여름 7만의 남군 병사들이 북으로 행군했다. 리 장군은 고지에 진을 치고 북군을 평원에 몰아넣고 대회전을 치를 계획이었다. 적당한 싸움터를 찾고 있었는데 작은 사건이 게티즈버그를 전장으로 만들었다.

컬프스언덕에 전시된 대포와 동상.
컬프스언덕에 전시된 대포와 동상.

당시 남군은 제대로 된 보급품을 받을 수 없었다. 특히 군복과 군화가 절실했다. 심지어 맨발로 행군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마침 게티즈버그에 가죽을 재단하고 신발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남군은 본격적인 전투 전에 이곳을 확보하고자 했다. 선발대가 공장으로 가던 중, 느닷없이 북군의 전초부대와 마주쳤다. 작은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후 서로의 지원 병력이 속속 도착했다. 소규모 전투가 급격히 확대됐다. 북군의 병력은 9만이었다. 

남군은 리 장군의 생각과 달리 평원에 진을 치게 되었고, 북군은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작은 언덕지대에 위치했다. 

7월 1일 전투 첫날, 남군 유웰과 힐 장군이 북군을 몰아넣었다. 북군은 게티즈버그를 내 주고 외곽의 컬프스언덕Culps Hills으로 패퇴했다. 남군의 승기가 보이는 날이었다. 게티즈버그 여행가들은 컬프스언덕을 가장 먼저 들르곤 한다. 언덕 전망대에 오르면 게티즈버그 시내와 싸움이 있었던 대평원을 볼 수 있다.

7월 2일, 전투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남군은 북군의 측면을 치기 위해 병력을 서남쪽으로 이동시켰다. 남군은 동과 서 그리고 북쪽 세 방향에서 북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남군은 서쪽에 있는 리틀 라운드 탑Little Round Top이라는 고지를 점령하고자 했다. 이곳은 북군의 진지를 내려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포사격을 통해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요지였다.  롱스트리트 장군이 이끄는 남군이 공격했지만, 북군 시클스 장군이 잘 막아냈다. 만일 이곳을 남군에게 내주었다면 게티즈버그의 승자는 달라졌을 것이다.

북군 복장을 갖춘 이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북군 복장을 갖춘 이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7월 3일, 전투의 마지막 날, 리 장군은 평원 전면전을 선택했다. 서쪽 평원을 달려 북군의 허리 라인을 치는 정면 돌파다. 참모들은 완강히 반대했다. 이미 아군의 피해가 심한 상태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날 것이 두려웠다. 리 사령관의 명령으로 피켓 장군이 이끄는 버지니아주 연대가 선봉에 섰다. 그들은 “조국 버지니아를 위하여!”를 외치며 진군했다. 당시 남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가 바로 그들의 조국이었다. 

이처럼 열세에도 불구하고 남군이 잘 싸운 이유 중 하나는 북부와 달리 남부 사람들의 애향심이 컸기 때문이다. 남부 사람들은 북쪽을 점령해 토지를 얻고자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타인(북부 사람)들에게 정복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부는 북부와 달리 독립된 문화권을 갖고 있었다. 남부 특유의 독특한 문화는 지금도 남아 있다. 애향심은 전의를 불태우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피켓 장군이 버지니아 연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전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북군은 이미 방어망을 구축한 상태였다. 착검된 머스킷 총을 어깨에 메고 열을 지어 평원으로 전진하는 남군은 많은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 이다. 게티즈버그 전투 장면을 묘사한 많은 작품들이 이를 주제로 삼았다. 피켓의 부대가 돌격하는 그림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감명을 준다.

컬프스전망대에서 바라본 게티즈버그 마을.
컬프스전망대에서 바라본 게티즈버그 마을.

휘트니가 없었다면 남북전쟁도 없었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피해 규모는 서로 비슷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적은 남군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명확히 누가 승리했다고 볼 수 없는 전투에서 링컨은 빠르게 움직였다. 군 최고 통수권자가 게티즈버그 전쟁터에 나타났다. 그리고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북군의 사기를 돋아주었다. 링컨이 연설했던 자리에는 지금 기념비가 놓여 있다.

사실 남북은 미합중국 태동시기부터 공존이 어려웠다. 출신부터 차이가 있었다. 남부는 영국의 부유층이거나 귀족이었다. 농장을 개발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반면 북부는 생존을 위해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이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또는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온 것이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폴란드, 아일랜드 등 다양한 출신지의 하층민들이다. 

북부는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쌓았고, 남부는 농업이 주요 소득원이었다. 작물은 담배와 목화였다. 목화 수요는 영국의 면직물 산업 발달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목화는 땅의 영양분을 많이 빼앗는다. 농사를 지은 다음해는 땅을 쉬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때문에 농부들은 더 넓은 땅이 필요하게 되었다. 넓어지는 토지만큼 흑인의 노동력도 더 필요하게 되었다. 흑인의 존재는 남부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남북전쟁 직전 남부의 흑인 수는 백인보다 많았다. 이에 백인들은 흑인이 많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목화는 늘어나는 흑인 노예까지 부양할 만큼 큰 수익을 내지 못했다. 목화는 노동집약적 작물이다. 특히 목화에서 씨를 뽑아내는 것이 고역이다. 노동자가 하루 종일 일해도 씨를 제거한 목화를 1파운드(0.45kg)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이처럼 목화는 수지타산이 안 맞는 작물이었다. 단 휘트니Whitney라는 청년이 등장하기 전까지. 

캐터틴국립공원에 멀리 캠프 데이비드가 보일 것 같은 침니락.
캐터틴국립공원에 멀리 캠프 데이비드가 보일 것 같은 침니락.

교사를 꿈꾸던 예일대 졸업생 휘트니가 없었다면 남북전쟁은 안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말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그는 남부 친척집을 여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목화씨를 제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는 노동자를 본다. 휘트니는 목화씨를 쉽게 제거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제거되지 않은 목화씨가 으깨지면 면화는 가치를 잃는다. 목화씨 제거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허리띠나 단추 구멍처럼 막상만들고 나면 별거 아닌 것도 처음에는 발명을 위한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면기(목화씨를 빼는 기구)도 그랬다. 휘트니는 닭장 안의 암탉을 잡으려던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닭을 낚아채는 것에 실패한 고양이 발톱에는 털 뭉치만 있었다. 그는 고양이 앞발처럼 도는 회전축을 만들고 그것을 사각형 틀 안에 장착했다. 목화솜을 틀 안에 밀어 넣으면 틈새로 나오는 솜이 회전축에 걸리면서 씨가 걸러지는 원리였다. 조면기는 생산성을 10배로 늘려주었고 남부에 부를 가져다주었다. 

한편 북부 사람들은 남부가 잘살게 되는 것이 싫었다. 결국 남부가 기득권을 갖게 될 것이고 권력이 그들에게 집중되는 것이 두려웠다. 이에 북부는 흑인 노동력을 제한하고자 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잘 포장된 표현으로 흑인 노예제를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흑인 노예제로 부를 쌓은 것은 남부보다는 북부 자본가와 상인들이었다. 그들이 운반선을 건조하고 독점적으로 노예를 공급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노예제 찬반을 표면적 명분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사치스 커버 다리.
사치스 커버 다리.

남군 유령 찾는 ‘고스트투어’도 인기

남북전쟁은 게티즈버그에서 가장 큰 희생을 냈다. 남북 합쳐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게티즈버그 평원에는 각 주에서 파병한 군인들의 위령비와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비 앞에는 추모하는 장식과 기념물이 놓여 있다. 남군 측 방문객들은 당시 남군이 사용했던 깃발이나 상징물을 갖다 놓는다. 북군 방문자들은 미국 성조기 등을 가져다놓는 게 일반적이다. 아직도 남과 북의 문화와 이념 차이가 있다는 걸 살펴볼 수 있는 장면이다.

참전 군인을 추모하기 위한 건축물 중에 가장 큰 것은 펜실베이니아주가 만들었다. 지상 7층 높이로 평원 중앙에 위치해 있다. 110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건물 안쪽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맑은 날에는 멀리 웨스트버지니아, 메릴랜드, 오하이오까지 보인다. 

10대들의 용감무쌍함은 동서고금 비슷한 것 같다. 얼마 전 백인 소년이 사진을 찍기 위해 이 전망대 난간을 넘어서다가 떨어진 사고가 있었다. 헬기로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사망했다고 한다. 고백컨대 필자의 아들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말릴 틈도 없이 허리 높이 난간을 넘어섰다. 넘는 도중 발이 걸려 중심을 잃고 떨어질 뻔했다. 순간 ‘공원경찰에게 걸려 벌금이나 왕창 맞고 정신 차려야 하는데’란 생각을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10대들의 사고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튼 격전지 안에 있는 트레일은 남군이 진격했던 길을 걷기도 하고, 북군이 방어했던 고지로도 이어진다. 피켓이 연대를 이끌고 돌진했던 평원을 가로질러 걸을 수도 있다. 어둠이 내리면 롱스트리부대의 진지 인근을 걸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서 아직도 이승을 떠도는 남군의 유령들을 본다고도 한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의 혼령이 살아서 다가온다고 한다. 오싹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고스트투어도 인기가 좋다. 지붕이 있는 사치스 다리Sachs Covered Bridge는 귀신을 종종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다리를 통해 북군이 진격했고, 남군은 퇴각했다. 다리 안에 서면 누군가가 말을 걸고 어깨를 툭 치기도 한단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린다고 하니 분명 남군 패잔병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식당 더 쿱을 운영하고 있는 최연묵 사장은 산악인이다.
식당 더 쿱을 운영하고 있는 최연묵 사장은 산악인이다.

‘캠프 데이비드’ 훔쳐보기

게티즈버그 트레일을 마치면 배가 고파질 것이다. 이곳 인근에 한식당이 있다. 재미산악연맹 워싱턴지부장 최연묵 대장이 운영하는 곳이다. 7년 전통의 순수 한국식 맛집이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이곳에서 한국의 맛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식당 이름은 ‘더 쿱The Koop’이며 손님 대부분은 젊은 미국인들이다. 제일 많이 나가는 메뉴는 양념치킨과 갈비라고 한다. 방문했던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음식을 포장해 가는 손님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또 둘러볼만 한 곳으로는 게티즈버그 남쪽 캐터틴국립공원Catoctin Mountain Park이 있다. 미국 대통령의 여름 별장으로 잘 알려진 캠프 데이비드Camp David가 있는 곳이다. 별장이 있는 인근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했다. 

말하자면 이곳은 ‘역재개발’된 곳이다. 산림이나 낙후된 지역을 도시공간으로 재개발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농장지대였던 곳을 생산성이 좋지 않자 산림으로 뒤바꿨다. 그리곤 이를 연방이 흡수해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별장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캠프 데이비드라고 이름 지은 것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다. 그의 아버지와 손자의 이름이 데이비드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세계 정상들의 회담이 이루어지고 역사가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건 1979년 카터 대통령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회담. 성공적으로 회담이 마무리되며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면서 자연스럽게 회담 장소인 이곳도 알려지게 되었다. 

캐터틴에는 13개의 트레일이 있다. 짧은 것은 1km에서 긴 것은 6km 정도다. 울프락과 침니락을 오르는 트레일이 가장 풍광이 좋다. 능선 너머 캠프 데이비드가 있는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캐터틴은 본디 바다였다. 6억 년 전 지층이 융기해 산이 되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지형 중 하나다. 그러니 여기서 만나는 바위들은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바위들 축에 들 것이다. 울프락은 백운대 잠수함 바위만 한 것이 마치 식빵처럼 쪼개진 형태다. 갈라진 크레바스를 둔 뜀바위도 있다. 잘못해서 발을 헛디디면 20m 틈새로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구조헬기가 많이 뜨는 곳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다. 

바위 틈 안은 서늘하고 물기가 적절히 있다. 여름날 뱀들의 안식처로 최고의 장소다. 방울뱀의 탈피 흔적도 많이 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흑곰도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니 사방 경계를 잘 해야 한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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