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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윤회의 수레바퀴 굴리듯 설산 향해 페달을 밟다

이남석 오지 자전거 여행가
  • 입력 2024.03.25 07:55
  • 수정 2024.03.2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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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안나푸르나 자전거 여행기 (2)]

마낭으로 가는 길에 본 잘생긴 풍광. 설산과 푸른 내와 관목 숲이 잘 어울린다.
마낭으로 가는 길에 본 잘생긴 풍광. 설산과 푸른 내와 관목 숲이 잘 어울린다.

자전거 여행의 장점 중 하나는 일상의 터전을 벗어나 낯선 환경과 사람들 사이를 누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주변의 간섭에서 벗어나 상대적 자유를 누린다는 의미이다. 지형, 음식, 문화가 다른 곳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여행하다 보면 그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와 감정이 어느새 달콤한 사탕처럼 느껴진다. 

고도를 천천히 올리며 변하는 풍광을 좇던 중 첫 번째 검문소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가 아닌 외국인인 내가 허가서를 내밀자 경찰은 여권을 요구했다. 아마 일반 트레커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밖에 세워놓은 자전거를 가리키면서 “자전거 여행자”라고 얘기하자 그때서야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 허가서에 나와 있는 정보를 방문자 기록부에 옮겨 적었다. “어디까지 갈 거냐?”는 질문에 토롱라(5,416m)를 넘어 포카라로 갈 예정이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갈 수는 있지만 매우 힘들 거라는 의미였다.

해발 1,700m의 탈Tal마을은 잘 그린 풍경화였다. 마을 뒤에는 수려한 폭포가 떨어지고 앞에는 만년설과 빙하가 녹은 물이 마르시앙디강이 되어 흐른다. 폭포가 얼마나 큰지 바람에 날린 물결이 숲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강 반대편에는 평화롭게 걷는 트레커들이 보였다. 내가 자전거로 가는 속도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걷는 이들이 더 빨랐다.

가는 동안 계속 포터들과 마주쳤다. 트레킹 루트보다는 차도가 지름길이다 보니 가이드가 트레커들을 인솔해 트레킹 길로 가고, 포터들은 차도로 걸었다. 예전만 하더라도 외국에 나오면 “일본 사람이냐?”고 물어왔는데 지금은 대놓고 “한국에서 왔냐?”고 묻는다. 

마낭(3,500m)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트레커들. 자연스럽게 말을 섞고 친해질 수 있었다.
마낭(3,500m)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트레커들. 자연스럽게 말을 섞고 친해질 수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안나푸르나

포터들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나는 무거운 자전거를 타거나 끌면서 그들과 동행했다. 요행히 내리막을 만나면 내가 그들보다 빨랐지만 곧이어 그들에게 따라잡혔다. 그럴 때마다 포터들은 내게 “힘내라”며 격려했는데 어찌 보면 내가 그들에게 해야 할 격려였다.

두 번째 검문소에서는 검표원이 “어째서 자전거는 가이드 없이 가느냐”고 물었다. 다소 황당해진 나는 “만약 자전거보다 앞서서 갈 수 있는 가이드가 있다면 당연히 함께 갈 수 있다”고 말했고,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농담”이라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이 길을 앞서간 외국인 자전거 여행자가 만든 GPS 트랙을 보면서 가니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네팔 히말라야 전역이 수력발전 같은 자체 발전으로 로지(여행자 숙소 겸 식당)마다 전력이 공급됐다. 덕분에 배터리 방전으로 GPS 앱을 탑재한 휴대전화를 못 쓰는 일은 없었다.

마을 입구를 표시하는 문. 불교 수행자인 요기 그림 아래에는 손으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불경 마니차가 있다.
마을 입구를 표시하는 문. 불교 수행자인 요기 그림 아래에는 손으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불경 마니차가 있다.

검문소를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찰의 일주문처럼 마을 입구를 표시한 구조물과 만났다. 벽면에는 명상 수행자인 요기 그림이 있고, 밑에는 마니차(손으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불경)가 있어 누구나 돌릴 수 있었다. 고지대로 갈수록 불교를 숭상하는 주민들이 많다는 증거였다. 티베트인들의 관습대로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경건한 마음으로 일주문 기둥에 머리를 댔다. 순전히 내 이기적인 욕심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최선이었다.

해발 3,500m 마낭Manang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헐벗고 눈 쌓인 봉우리가 자주 나타났다. 마을마다 지붕에는 타르초가 나부끼고 마니석과 마니차를 설치한 영탑이 자주 나타났다. 토체Thoche마을에 도착하자 오후가 되었다. 마르시앙디강이 두드콜라Dudh Khola강과 합쳐지며 마나슬루Manaslu로 가는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푸른 숲보다는 거칠고 메마른 토양과 눈 덮인 설산을 사랑하다 보니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흥이 일어났다.

토체마을의 양떼. 이곳 마을에서 마나슬루(8,163m)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토체마을의 양떼. 이곳 마을에서 마나슬루(8,163m)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나흘 전 포카라를 출발했습니다”

토롱라(5,416m) 정상까지 가는 동안 내가 보게 될 마지막 숲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자전거를 탄 젊은 친구가 나타났다. 텁수룩한 수염에 시골 농부를 연상케 하는 소박한 모습의 청년은 나와 같은 코스를 달리는 중인 프랑스 자전거 여행자였다. 그는 좀 더 여행을 쉽고 자유롭게 하려고 뒤에는 작은 패니어(짐 가방 거치대) 두 개를 매달고 앞에도 간단한 짐으로 꾸렸다. 오지에서 가장 반가운 것은 같은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을 때다. 

계획을 들어보니 앞으로 지구를 서너 바퀴 돌고도 남을 만큼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젊은이는 안나푸르나 여행을 마치고 곧장 이란으로 갈 계획이라고 했다. 초콜릿과 빵을 나눠 먹으면서 30분 넘게 대화를 나눴다. 그는 워낙 힘이 좋아 나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숙소에서 다시 만나기를 여러 날 반복했다.

고도 3,000m가 되자 나무는 가을 색으로 탈색 중이었다. 수년 전만 하더라도 마낭까지 도로가 뚫리지 않아 대부분 트레커들은 베시샤르에서 걸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마낭까지 도로가 뚫리고 오르막이나 절벽 같은 위험 구간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과적한 지프나 트럭들이 험하게 달리는데다 도로 관리가 되지 않아 비포장도로보다 사정이 더 열악했다.

트레커의 짐을 지고 가는 포터들. 여행 내내 가장 자주 마주친 이들이다. 무거운 짐에 힘겨워 보이는데, 그들은 항상 내게 “힘내라”며 격려했다.
트레커의 짐을 지고 가는 포터들. 여행 내내 가장 자주 마주친 이들이다. 무거운 짐에 힘겨워 보이는데, 그들은 항상 내게 “힘내라”며 격려했다.

야영 장비를 완벽하게 준비했기에 한 번은 텐트를 치고 싶었지만, 막상 시도하려고 하면 워낙 저렴한 로지(여행자 숙소 겸 식당)가 많아 그때마다 계획을 접었다. 숙박비가 우리 화폐로 5,000원에 불과할 정도로 저렴했다. 대신 계획과 달리 저녁과 아침 식사를 로지에서 먹어야 했다. 

쿠킹장비와 야영장비, 비상식량까지 짐이 너무 무거워 식량은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그동안 자전거 여행에서 얻은 경험상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그럴 때를 대비해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가지고 다녔다.

주변에 설산이 즐비하고 높은 고도에도 초지가 넓어 경작 대신 유목을 하는 가구가 많다. 환경에 따라서 사람들이 입는 것과 먹는 것, 그리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나면 그 자체가 인간과 자연이 들려주는 큰 서사시이고 아름다운 노래다. 

마낭으로 가는 길이 강 반대편으로 이어지면서 마지막 다리를 건넜다. 구조물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걸려 있는 타르초가 정답고 환하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에서 선업을 쌓고 복을 지어 궁극에는 불교의 사생四生을 초월하려는 사람들의 순수한 종교적 열망 때문일 것이다.

로지에서 버너로 음식을 조리해 먹는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팠다.
로지에서 버너로 음식을 조리해 먹는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팠다.

해발 3,000m를 넘기자 숲을 덮었던 교목은 사라지고 대신 사방에 설산이 우뚝하다. 영탑과 마니석을 쌓아놓은 곳에는 룽다(불교 경전이 적힌 깃발)가 펄럭거리고, 계곡물은 더 차가워지고 물빛은 하늘보다 깊었다. 

마침내 안나푸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모든 풍광이 내 안에서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알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 자연이 빚은 환경, 비현실적인 인간의 상상력이 창조한 모든 것이 잘 어울렸다. 

사람이 만든 모든 구조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연이 된다. 길옆에 세워진 마니차나 영탑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영탑 위에 놓인 돌에 새겨진 글자를 보면서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받는 영적인 충격과 바람이 깊은 신심으로 이어지면 얼마나 정교하고 큰 힘을 내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마낭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2층 처마에 일렬로 걸어놓은 옥수수, 마당 한 편에 쌓아놓은 장작더미는 왜 그렇게 다정하게 보이는 걸까. 아마 사람 사는 모습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절벽 밑에서 휙 올라오는 바람이 몸을 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바위 절벽을 절개해 만든 길. 위험하지만 아름답다.
바위 절벽을 절개해 만든 길. 위험하지만 아름답다.

“또띠 5장만 구워 주십시오.”

“1,000루피예요.”

로지에 여장을 풀고 방에서 쿠킹을 하겠다고 하자 주인은 대신 저녁을 사먹어야 한다고 했다. 또 달밧(네팔식 백반)을 먹을 생각을 하니 힘이 빠져, 음식값을 낼 테니 또띠를 구워 달라고 했다. 주인은 허름한 한국인 자전거 여행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따끈한 또띠를 꿀에 찍어 먹으니 맛이 환상이었다. 

한밤중에는 기온이 영하 7℃까지 내려갔다. 밖으로 나오니 언 달빛이 쏟아지는 히말라야의 산자락은 육중하고 고요했다. 다음날 나는 자전거 위에서 크게 힘을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페달을 돌렸다. 열대림 같은 숲에서 출발해 눈 덮인 설산 가까이 다가가는 게 경이로울 뿐이었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귀여워 페달을 멈췄다. 인솔하던 네팔 선생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귀여워 페달을 멈췄다. 인솔하던 네팔 선생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악우岳友여 눈꽃이 되어 편히 잠드소서’

영탑 벽면에 새겨진 한국어 동판을 보고 깜짝 놀라 자세히 보았다. 이런 먼 곳에 새겨진 한국인은 누구일까. 살펴보니 1989년 안나푸르나2봉을 등반하던 영남대학교 알피니스트 2명의 명복을 비는 추모비였다. 출생연도가 1962년이니 살아 있다면 60세를 넘긴 나이다. 

산을 사랑하고 눈을 동경하던 아름다운 청춘이 안나푸르나 꼭대기에 묻힌 것이다. 알피니스트가 살던 때와 같은 시대를 청춘으로 달리던 내가 이제 늙은이가 되어 자전거와 함께 그 앞에 있다. 아! 사생이 일여一如하지만 먼저 떠난 사람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영탑을 떠나며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연히 발견한 한국인 알피니스트의 추모 동판. 가슴이 먹먹했다. 1989년 안나푸르나2봉을 등반하던 영남대학교 원정대원들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한국인 알피니스트의 추모 동판. 가슴이 먹먹했다. 1989년 안나푸르나2봉을 등반하던 영남대학교 원정대원들이었다.

물소리가 멀어진 대신 바람소리가 다정하다. 마음 안에는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지만 그건 그때 일이다.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경쾌하게 펼쳐지는 히말라야 장관을 감상하는 일은 큰 기쁨이다. 나는 이 큰 즐거움을 적절한 언어로 변환해서 머리에 담기에 바빴다. 새들이 창공에서 깃털을 휘젓는 소리부터 바람이 관목을 치며 부르는 노래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이 표현하는 시적 감각을 완벽하게 뛰어넘었다.

“자, 멈추고 뒤를 보세요!”

한 작은 마을을 지나가다가 아이들을 인솔해 학교로 가는 선생님과 만났다. 사진 한 장을 부탁하면서 카메라를 건네자 아이들과 함께 찍어 주겠다면서 저만큼 뒤로 물러났다. 이제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아이들과 함께 있자니 내가 늙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서글펐다. 아이들의 감성을 잘 다듬고 빛나게 해줄 수 있는 저 선생님은 얼마나 행복할까! 

마을 입구마다 어김없이 보이는 마니차를 매단 건물과 마니석을 쌓아놓은 돌무덤에서 나는 언제나 자전거를 세웠다. 주민들의 불심을 읽고 이해할 기회도 되지만 주변 마을이나 설산과 잘 어울리는 독특한 건축양식과 색깔 때문이다. 

돌발 상황을 대비해 텐트, 침낭, 버너, 식량, 자전거수리 부품까지 어디서든 버틸 수 있게 30kg의 짐을 꾸렸다. 오르막에선 끌바(자전거를 끌어서 올라가는 것)를 하느라 사진을 거의 찍지 못했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풍경의 아름다움에 갈수록 빠져들었다.
돌발 상황을 대비해 텐트, 침낭, 버너, 식량, 자전거수리 부품까지 어디서든 버틸 수 있게 30kg의 짐을 꾸렸다. 오르막에선 끌바(자전거를 끌어서 올라가는 것)를 하느라 사진을 거의 찍지 못했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풍경의 아름다움에 갈수록 빠져들었다.

서역의 고명한 승려들이 히말라야를 넘어 붓다의 법을 전했다. 그들은 사생이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장 쉬운 말로 얘기했다. 너무 쉬운 말로 표현했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승려들은 사람들에게 내세의 복은 현세의 공덕으로부터 시작된다면서 남에게 베풀고 선하게 살 것을 권했다.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했다. 그 모든 게 히말라야에 있었다.

자전거는 오르막에서 힘을 쓰는 만큼 빨리 올라간다. 반대로 빨리 지쳐 전체적으로 간 거리는 같았다. 이 평범한 사실을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의 총량은 언제나 영ZERO이다. 부를 쌓아 행복해진 사람은 더 부자가 되기 위해 불행해지고, 큰 병을 얻어 불행한 사람도 인내하고 생활을 절제해 마침내 완치되는 행복을 얻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는 동안 자전거는 어느새 평지로 들어섰다.

문득 ‘아! 이곳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얼마나 멋진 작품이 되겠는가!’라고 감탄할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많았다. 옅은 남색 빛을 발하는 계곡이 흐르고 주변으로 풍화된 토양과 기묘한 형태로 울퉁불퉁 솟은 암릉과 구릉이 있다. 멀리 눈 덮인 봉우리와 좌우로 늘어선 산맥은 마침내 화룡점정이 되어 완벽한 그림을 완성했다. 여행, 특히 자전거 여행이 아니고서는 눈과 피부로 어떻게 이런 경치를 맛볼 수 있겠는가. 

마르시디앙강에 놓인 현대식 철교. 불교 경전을 적은 타르초가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마르시디앙강에 놓인 현대식 철교. 불교 경전을 적은 타르초가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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