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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봉화산 르포

월간산
  • 입력 2005.02.01 18:31
  • 수정 2018.12.1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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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의 비백(飛白)’ 지나 백운산 중재까지

치재에서 출발하여 고남산을 향하다 바라본 백두대간.
치재에서 출발하여 고남산을 향하다 바라본 백두대간.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게 좋아.”

포레스트 카트의 자전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 ‘작은 나무’가 엄마 아빠를 차례로 잃은 다음 산으로 들어가면서 체로키 인디언인 외할아버지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다. 소설이 아닌 현실 속에서도 이 말은 옳다. 우리는 종종 임계점을 넘은 육체적 피로의 정신적 치유 능력을 경험하곤 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훨씬 더 생리적이고 때로는 성(性)적이까지 하다.’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향하는 취재팀.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향하는 취재팀.
일본 알프스의 산마을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소설은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 문단의 기인 마루야마 겐지의 말이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그러나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냉소를 내장한 그의 언어는 ‘거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통조림처럼 가공된 자연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혐오한다. 그러나 사실 자연을 표현하는 데 상투적 표현에 기대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판에 박힌 감탄사를 남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다. 그래서 나는 백두대간 종주기를 쓰면서 독자와 공모자의 관계이기를 희망한다. 진정한 공모자라면, 영화에 나오는 은행 강도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눈빛만으로 액션의 타이밍을 찾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빛을 나눌 것인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산행의 고통을 기꺼이 즐기는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나는 20kg에 가까운 배낭을 지고 마냥 즐거워하는 대간 종주자를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난동이라도 부릴 그 고통을―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즐긴다. 왜?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자신과의 싸움’이니 ‘성취감’이 하는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모종의 ‘중독성’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중독자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최소한, 엄살스런 느낌표나 낯간지러운 감탄사만 떼내도 우리의 공모는 성공적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없는 듯하나 분명히 그어지는 백두대간 능선

비백(飛白)이라는 것이 있다. 붓글씨의 획에 드러난 흰 자국을 말한다. 두번째 구간의 출발점인 고기리 삼거리에서 수정봉으로 오르는 초입인 노치 마을까지가 바로 대간 등성마루의 비백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솔직히 말하면 산줄기는 거의 지워져 있다. 하지만 대간 마루로서 분수령의 지위는 잃지 않는다. (진행방향을 기준으로) 길의 왼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끝내는 낙동강에 몸을 섞을 것이다.

대간 길은 고기리 삼거리에서 운봉쪽으로 1km쯤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운천초등학교 왼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노치 마을로 이어진다. 마을 뒷산을 보면 랜드 마크처럼 선 네 그루 우람한 소나무가 보이는데, 그것을 기준 삼아 고샅길로 들어서면 ‘노치샘’이라고 쓰인 마을 샘이 나온다. 여름이라면 오아시스처럼 반가울 샘이다.

어쩌면 대간 종주자들끼리의 연대감은 한 물을 먹은 데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공동 우물을 쓰는 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은 아직도 1세기 전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백두대간 종주자라면 무작정 걷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우리 고유 정서의 복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지 싶다.

노치샘을 출발하여 대간 등성마루로 오르는 취재팀.
노치샘을 출발하여 대간 등성마루로 오르는 취재팀.
노치샘에서부터 대간 길은 수정봉을 향해 키를 높이면서 노치 마을의 당산 소나무를 지난다. 아름이 넘는 건강한 육송인데도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운치 있게 휘어져 있다. 소나무 앞에서 잠시 몸을 돌려세워 만복대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줄기들을 바라본다. 사실 차례로 지나게 될 수정봉이나 고남산은 백두대간이 아니었다면 동네 뒷산으로 머물렀을 산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한 부분을 차지함으로서 지리산과 같은 명산과 대간 멧등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낮은 산이 없이는 높은 산도 없는 법. 대간?정간?정맥의 산줄기 체계가 강과 산의 유기체적 관계를 통찰한 결과물이듯, 산의 높낮이 또한 거대한 생명체로서 산줄기의 꿈틀거림이다.

노치에서 수정봉(804m)까지는 1시간 남짓. 수정봉 정상은 이름의 분위기와는 달리 두루뭉술하다. 수정봉에서 여원재까지는 2시간 정도. 그런데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이 길의 운치가 보통이 아니다. 끝없이 소나무 숲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소나무 사랑은 신앙에 가깝다. 소나무 얘기만 나오면 우리는 아직도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금줄), 소나무와 함께 살다가(소나무로 지은 집), 소나무의 품에 안겨(관) 사라진다는’, 이제는 거의 생활문화 밖으로 밀려난 얘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소나무가 또 시련을 맞았다. 솔잎혹파리를 거의 제압하고 나자 소나무재선충이라는 더 고약한 놈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1905년 일본에서 처음 발견됐다는 소나무재선충은 1988년 부산의 금정산으로 상륙했고, 현재는 포항 지역까지 북상했다는데, 아무튼 더 이상 피해가 없기만을 빌어본다.

초창기 종주자들 길 찾기에 고생했을 구간

봉화산에서 월경산으로 가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조망을 즐기는 취재팀.
봉화산에서 월경산으로 가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조망을 즐기는 취재팀.
 기우는 해와 함께 시작한 산행이어서 여원재(450m)에서 또 하루 대간 등성이를 베게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꿈결 속에서, 그 옛날 이 고갯마루에서 순절한 한 여인을 생각하면서.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함양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가 지나는 이 고개는, 고려 말 왜구의 희롱을 거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인이 산신이 되어 이성계의 전승을 도왔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튿날 아침, 여원재 마루에 선 돌벅수 ‘운성대장군’에 눈인사를 건넨 후 다시 대간 길을 잇는다. 여원재에서 시작하는 대간 길은 솔숲에서 열린다. 60~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인공 조림된 숲과는 격이 다르다. 캠프사이트로도 더 없이 좋을 숲이다.
길은 계속 소나무숲 사이로, 오른쪽으로 장교, 가동 마을을 끼고 나들이를 나선 듯 경쾌하다. 때론 농로와 겹쳐지고 무덤을 지나기도 하는 구간이므로 표식기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초창기 종주자들은 길을 이어가는 데 상당히 고심했을 것 같다.

사치재를 넘기 전 무덤가에서 행복에 겨운 나른한 휴식.
사치재를 넘기 전 무덤가에서 행복에 겨운 나른한 휴식.
 여원재에서 2시간쯤 지나면 고남산이다. 높이도 846.5m에 지나지 않는 산이지만 조망만큼은 높은 산에 뒤지지 않는다. 반야봉을 비롯하여 노고단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능선과 남원시가까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입지적 특성은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한국통신의 중계탑이 대변한다. 괴기스러울 정도의 살풍경이다. 전파도 백두대간은 쉽게 넘지 못하는 모양인지, 광주의 무등산과 합천의 가야산이 이 산에 선 중계탑 덕분에 핸드폰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편리는 자연으로부터 꾸어온 것이다. 자연이 동의한 바 없으니 약탈인 셈이지만.

오래 전부터 고남산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때는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리었다 한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이 이 산에 천제단을 세우고 전승을 기원했는데, 동행한 정도전이 이 산의 기운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 했다는 데서 산 아랫마을 이름이 ‘권포(權布)’가 됐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성계는 이 산 정상에서 전장의 지형지물을 샅샅이 살핀 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고남산에서 매요리까지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편안한 길이다. 백두대간의 등마루에 걸터앉은 매요리는 대간 종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쉼터다. 마을 인심도 좋아서 경로당은 곧잘 종주자들의 잠자리로 변한다.

매점 할머니는 백두대간 전문가 수준

봉화산 정상에서 내려서는 억새밭길.
봉화산 정상에서 내려서는 억새밭길.
 마을 끄트머리에서 매점을 하는 신순남 할머니(70)는 우리의 행색을 보고 대뜸 이렇게 말한다.

“여원재에서 출발했어? 그럼 오늘 복성이재까지 가겠구만.”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수없이 거쳐 갔을 종주자들은 이 할머니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별별 사람 다 보지.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 맞나 싶게 잘 차려 입은 신사도 있지만, 거지꼴도 숱하지.”

최고급 호텔과 선술집을 합쳐 놓아야 볼 수 있을 인간 군상이다. 사람을 대함에 층하를 두지 않는 산의 미덕이다.

매요리에서 또 지워져 버린 대간의 멧등은 운성초등학교(폐교 상태) 옆을 기준으로 가산리 뒷산으로 이어지지만 도로를 따라 우회할 수도 있다. 버들재(유치) 삼거리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가산리 뒷산의 정상(618m)에 서면 모래재(사치)가 눈 아래에 걸린다. 모래재는 지리산에서 출발한 대간이 처음으로 고속도로(88올림픽 고속국도)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간 종주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 도로를 가로질러야 한다(앞으로 대간 종주자의 수를 파악하려면 이 도로에서 무단횡단 범칙 스티커를 발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지리산 휴게소쪽으로 갓길을 가다가 지하 통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종주자들의 거의 없지 싶다.

여원재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던 소나무 숲길은 모래재를 지나면서부터 자취를 감춘다. 모래재 오름길을 지나서 억새 능선을 만나면서는 적이 아쉽다. 활엽수림 지대를 걷는 것과 달리 마른 솔잎을 밟는 느낌은 융단을 지나는 것보다 더 푹신하다. 지나온 솔숲에 대해서 나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의 모습으로 기억해 둔다.

흔하고 흔한 게 소나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 산림의 대부분은 참나무림으로 천이(遷移)가 완성돼 가고 있다. 자연스런 현상이긴 하지만 다양성 차원에서 보면 우려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모래재에서 새맥이재를 지나 복성이재를 향하는 대간 길은 참으로 순하다. 오른쪽으로는 산동네 치고는 꽤나 너른 들판에 안긴 마을이 옹기종기 이어진다. 남원시 운봉읍 일대다. 그런데 이 한가로운 마을이 한때는 혁명의 싹을 틔우기도 했고 좌절시키기도 했다.

40km 전구간, 동네 뒷산 산책하는 기분 들 정도로 순해

 

백두대간 산마을인 운봉읍 삼산리의 소나무 숲.
백두대간 산마을인 운봉읍 삼산리의 소나무 숲.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운봉의 황산에서 치른 왜구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의 태조가 될 전기를 마련한다. 고려 말 우왕 3년(1380) 8월, 500여 척의 대선단으로 침입한 왜구는 충청?전라?경상 3도를 유린하기 시작하여 9월에 운봉에까지 북상한다. 이 때 아지발도를 우두머리로 한 왜구는 이성계에게 섬멸되는데, 이 전투를 역사는 황산대첩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조선 말 동학민중혁명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또한 운봉이다.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북상하던 동학군들이 고남산 서쪽 기슭 가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렸다.

또한 운봉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이다. 발성이 가볍고 소리의 꼬리가 긴 서편제는 전라도 서남 지역의 소리고, 무겁고 호쾌한 발성의 동편제는 백두대간의 이남 즉 전라도 동북 지역의 운봉에서 태어났다.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가왕(歌王) 송홍록(1780년 경-1863년 경)과 국창(國唱) 박초월(1916-1983)이 태어난 곳인 까닭이다. 최근 남원시에서는 황산대첩비 옆 비전 마을에 이들의 생가를 복원했다. 하산길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들러볼 만한 곳이다.

 

여원치의 마애불. 임진왜란 때 숨진 여인의 넋이 마애불로 화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여원치의 마애불. 임진왜란 때 숨진 여인의 넋이 마애불로 화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복성이재를 지나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을 넘나드는 고개인 짓재(지도에 치재라고 표기돼 있지만 나는 짓재라고 쓴다. ‘치’와 ‘재’ 모두 고개라는 뜻인데 동어를 반복할리 없지 않은가. 고개가 가팔라 갈 ‘之’자로 오른 데서 연유한 이름이 아닐까)에서 운행을 마치고 막영 준비를 끝내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자리에 든다. 옆 텐트에서는 금방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코고는 소리의 주인은 이번 취재에 동행한 진주 산악인 왕현수씨. 만약 잠든 사이에 멧돼지 떼가 짓밟고 지나간다 해도 우리는 그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그들의 침입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사흘 째 아침. 눈(雪)은 게으른 여자의 성급한 화장처럼 채 땅을 다 덮지도 못하고 그쳤다. 안도와 실망이 교차한다. 늘 이런 식이다. 경치가 좋아서 눈이 즐거우면 다리가 괴롭기 때문이다. 대간 종주자라면 누구나 이런 양가감정에 시달릴 것이다.

짓재에서 봉화산(919.8m) 오름길은 철쭉 꽃밭이다. 봉화(烽火)라는 이름값을 철쭉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철쭉 덕분에 꽃산행지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산이지만 정상 주변엔 갈대만 무성하다. 정상 아래까지 뚫린 임도는 종주자에겐 캠프 사이트, 걷기 싫어하는 사람에겐 편안한 정상 조망을 선물해 준다.
봉화산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백운산(1,278.6m) 아래 중재까지는 편안한 참나무 숲길이다. 어제 지나온 길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흔히 종주자들은 이번 구간을 가장 볼품없는 곳으로 친다. 건성으로 산을 대하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세심하게 오관을 작동시키면 다양한 숲의 표정만으로도 산행은 즐거워진다.

이번 산행의 전구간(약 40km)은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게 할 정도로 순하다. 곧추선 백운산과 이어질 덕유산에 앞선 숨고르기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즐거운 하산길을 위한 정보 쪽지>

행정리 마을숲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 받아

일찍 산행을 끝냈거나 하루쯤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기 좋은 동네가 운봉읍 일대다. 아직도 옛 풍정이 그윽하다. 동구마다 정자가 있어 여름철 잠자리로 삼을 만하고, 요즘 같은 때는 동네 경로당에서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이 일대에서 둘러볼 만한 곳은 운봉읍의 황산대첩비와 송홍록?박초월 생가, 아영면의 흥부마을(복성이재 아랫마을인 성리가 바로 그곳. 동면의 성산리에서 쫒겨난 흥부가 이곳에 와서 부자가 된다) 등이 있다.

하지만 진짜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마을숲이다.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의 마을숲은 산림청과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 유한킴벌리에서 공동 제정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마을숲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행정리 맞은편 삼산리의 소나무숲도 일부러 들러볼 만한 곳이다. 땅을 하늘로 아는지, 굽고 뒤틀린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리지어 승천하는 용 같다.

/글 윤제학·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손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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