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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창간특집] <월간山> 창간된 해인 1969년생 산꾼들의 모임 ‘닭스클럽’

월간산
  • 입력 2009.06.0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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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山>이 세상에 모습을 처음 보인 1969년은 우리 산악사에 길이 남을 만한 크고 작은 일이 많았던 해다.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해외 원정 대비 훈련 중이던 한국산악회 회원 10명이 눈사태에 매몰당하는 대형사고로 시작되었으나 북한산 인수봉과 선인봉에 수많은 등반로가 개척되어 한국 클라이밍의 붐을 일으킨 해이기도 하다. 도봉산 은벽길과 어센트길, 인수봉 우정A와 B, 하늘길, 서면 슬랩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길이 탄생했다.

이렇게 클라이밍 붐이 한창 일기 시작한 기유년(己酉年)에 태어난 닭띠들이 뭉쳤다. 현재 8,000m 14개 거봉 무산소 등정 레이스 중인 김창호(서울시립대 OB·LS네트웍스)씨와 한국을 대표하는 고산거벽 등반가로서 위치를 굳힌 김세준(익스트림라이더 강사)씨를 포함한 남자 15명 외에 김지영(봔트산악회)씨 등 여성 산악인 7명이 똘똘 뭉쳐 ‘닭스클럽’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월 한국산악문화회관에서 열린 박태윤 등반사진전에서 기념촬영한 닭스클럽 회원들. 앞줄 가운데가 박태윤씨. 이후 시계방향으로 정은영, 정대진, 임일진, 김세준, 
 김창호, 김성수, 조경아, 강용성, 류광열, 김지영, 김재문, 권아영씨.
지난해 1월 한국산악문화회관에서 열린 박태윤 등반사진전에서 기념촬영한 닭스클럽 회원들. 앞줄 가운데가 박태윤씨. 이후 시계방향으로 정은영, 정대진, 임일진, 김세준, 김창호, 김성수, 조경아, 강용성, 류광열, 김지영, 김재문, 권아영씨.


“회칙도, 회비도 없어요. 회장도 물론 없고요”

현재 22명 닭스클럽 회원의 성향과 직업은 매우 다양하다. 김세준·김창호·전양준씨는 산악계에 잘 알려진 인물. 스스로 ‘히말라야의 방랑자’라 표현하는 김창호씨는 파키스탄 전문가로 통한다. 그는 대학 산악부 시절인 1993년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암탑인 트랑고 타워를 등반한 이후 파키스탄의 매력에 빠져 10여 년 동안 파키스탄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김창호씨는 2005년 세계적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초등 이후 성공한 팀이 없는 낭가파르밧 횡단 등반에 성공하고, 최근 몇 년 동안은 8,000m 14개 거봉 무산소 등정을 목표로 등반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바투라2봉(7,762m) 세계 초등에 성공하고 올 봄 마나슬루에 이어 다울라기리마저 등정한 김창호씨는 현재 8개 봉 무산소 등정을 기록하고 있다.

김세준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고산거벽 등반가다. 1999년 캐나다 스노패치 스파이어 등반으로 해외 거벽에 눈을 돌린 그는 파키스탄 오거섬(5,600m)과 나와즈브락을 신루트로 오르고, 2004년에는 캐나다 배핀섬에 한국 최초로 진출해 여러 거벽에서 신루트를 개척했다. 이후 그는 인도 강고트리 메루피크 중앙봉 샥스핀(6,450m)과 투이좀(6,158m) 북벽 신루트 개척에 이어 지난해에는 인도히말라야의 메루피크(6,660m) 북벽 세계 초등에 성공했다.

2005년 대한민국 산악상 개척등반상을 수상한 그는 현재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에서 인공등반 기술 전파에 힘쓰고 있다.

설악산 소승골(10개)과 선인봉 청악길을 개척한 바 있는 전양준씨는 한겨울이면 빙벽대회에 불려 다니느라 본업을 뒤로해야 할 만큼 루트세터(route setter)로서 많은 활동을 펼치고 있는 클라이머다. 전양준씨는 1998년 선운산 자연암벽대회를 처음으로 안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인공벽대회 때도 세팅을 맡았고, 2001년 토왕빙폭대회 이후 매년 국내 빙벽대회 대부분의 루트 세팅을 맡아왔다.

닭스클럽의 모태는 이들 세 사람의 작은 만남이었다.

“소문을 통해 서로에 대해 어렴풋이 알기는 했지만 친구로 제대로 사귄 것은 7~8년 전부터예요. 반가웠어요. 산에 다니면서도 기유생 닭띠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보자마자 말을 텄어요. 그러다 기왕이면 동갑내기끼리 제대로 된 모임을 만들어보자 마음먹고 2006년 6월 15일 정식 모임으로 발족한 거예요. 알음알음 한 명씩 늘어나다 지금은 스무 명이 넘었어요. ‘닭스’란 닭들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카페에 이름을 올릴 때는 ‘아무개닭’ 하고 이름을 붙여요.”

닭스클럽은 회장은 물론 회칙과 회비도 없고 정기모임도 없다. 보고 싶거나 소주 한잔 하고플 때 만난다. 해서 번개모임이 주를 이루고 누가 원정을  나가거나 들어올 때 만나는 일이 많다. 이렇게 자유스런 성격의 모임이지만 가입 요건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산을 무지무지 좋아해야 하고, 주민등록증상 1969년생이어야 한다. 하루만 차이가 나도 자격이 없다. 그 외에는 아무 조건이 없다.

정기산행 역시 없다. 각자 소속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만날 때마다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다. 그렇지만 짧은 만남 동안 쌓은 정은 대단하다. 누가 해외 원정을 간다 하면 격려차 모임을 갖고, 다녀오면 종잇장처럼 얇아진 뱃살 불려주겠다고 모인다. 김창호, 김세준 두 닭이 그런 모임의 주역들이다.

닭스클럽 회원들은 술 잘 마시기로 소문나 있다. 남녀 불문하고 두주불사형으로 해뜰 때까지 참석자 전원 한자리에 있을 때도 있다. 회원 한 명 한 명 끊임없는 입담에 난상토론이 새벽까지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회원 한 명 한 명 직업 다양하고 취향도 제각각

우연일까. <월간山> 창간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6월에 정식 결성된 닭스클럽 창립 멤버 모두 뛰어난 클라이머는 아니다. 고교 시절 히말라야의 고줌바캉(7,806m) 동계 등정에 성공한 스포츠클라이머 출신으로 광운전자공고 교사로 임용된 이후 산악부 지도교사이자 심판·경기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류광렬(광운OB산악회)씨나 지난해 아시아 황금피켈상을 수상한 김용선(청죽산악회)씨처럼 대단한 클라이머도 여럿 있지만 등반 경력이 그리 길지도 않은 아마추어 수준의 회원도 많다. 그렇지만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엑스필름 대표 임일진(한국외국어대 OB)씨는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산악 영상물 촬영감독이다. 하드프리 영상물인 ‘Breathe 2 Climbing’에 이어 ‘Another Way-Breathe 2 Climbing, Vol 2’ DVD를 제작하는 등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펼쳐온 임 감독은 지난해 이탈리아의 트렌토에서 열린 제56회 필름 페스티벌 트렌토(Trento Film Festival)에 ‘벽(壁·The Wall)’을 출품해 ‘프레미오 마리어 벨로(Premio Mario Bello)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올해 초에는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디자이너 산악인 임덕용(악우회)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산악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임 감독이 동영상 전문가라면 박태윤씨는 정사진(停寫眞) 전문가다. 20여 년간 사진 촬영에 열중해온 그는 지난해 1월 말 산악문화회관에서 첫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이 사진전은 회원들을 한층 결속시켜주는 역할도 했다. 전시회 비용 대부분을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아 해결했고, 팸플릿은 임일진씨가 제작해주었다. 그 사이 회원들 사이에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사진전에 누구보다 정성을 쏟았던 엄정배(익스트림라이더)씨 또한 개인 암실을 가지고 있을 만큼 사진 매니아다.

여성 회원들의 활약 또한 대단하다. 닭스클럽의 살림꾼인 김지영(한국봔트클럽)씨는 고교를 졸업하던 해인 1988년부터 거의 매주 워킹 산행을 해온 산아가씨 출신으로 2001년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을 나오고 한국봔트클럽에 가입하면서 열성 클라이머로 변신, 2004년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를 함께 나온 동기들과 함께 캐나다 스쿼미시를 등반하고 2007년에는 후배와 둘이서 요세미티 로스트 인 아메리카(Lost in Ameracia)를 등반했다. 한국감정원에 근무하는 김지영씨는 닭스클럽 회원들 사이에서 수채화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이미 여러 회원을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려냈다.

정은영(여성산악회)씨는 시루떡 먹을 욕심에 언니 따라 시산제 산행에 참가했던 게 인연이 되어 한국등산학교 정규반, 익스트림라이더, 정승권등산학교 빙벽반까지 마친 맹렬 산악인이다. 2005년 22시간에 걸친 토왕빙폭 등반 이후 산을 끊겠다 다짐한 적도 있지만 결심은 얼마 가지 못했고, 오히려 등반 열정이 더욱 뜨거워졌다. 히말라야 거봉 등정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오은선·고미영씨와 함께 올 가을 제10위 고봉인 안나푸르나(8,091m) 등반을 목표로 맹훈련 중이다.

이 밖에 바위 울렁증을 극복하기 위해 2007년 여름 코오롱등산학교 암벽반을 마친 뒤 등반의 세계에 빠져든 IT 전문 번역 프리랜서 권아영(한걸음산악회)씨, 수많은 등반경기를 거치고 개인 암장을 운영하는가 하면 1급 경기지도자·1급 루트세터·2급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한 뒤 경기등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조경아(수원클라이밍센터 대표)씨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정대진(관동대 OB·강원대학산악연맹 부회장) 회원은 한국대학산악연맹 자연보전 부회장과 우이령보존회 청년생태학교 위원장, 대한산악연맹 청소년위원 등으로 환경보존과 청소년 활동에 이바지하고 있다.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저흰 젊잖아요”

10년간의 단독산행 이후 최근 10년간 암빙벽 등반에 주력하고 있는 해외 트레킹 전문가 김재문(된비알산악회)씨와 1999년 로체 남벽을 등반하고 2007년 엘브루즈를 등정한 이승혜(부천클라이밍센터·부천시청)씨도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안타깝게도 몇 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유명을 달리한 회원도 있다. 시트콤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주정은(알피나산악회)씨는 지난해 3월 초 위암으로 사망했다. 병을 알기 전까지 산악영화 시나리오를 만들어온 주정은씨는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닭스클럽 회원들을 도우미로 참가시킬 생각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 올해 초 청송빙벽대회에서 15년 만에 만나 닭스클럽에 가입한 이승혜씨.왼쪽은 전양준씨. 2 올해 초 진동리에서 열린 설피 만들기 행사에 참가한 정은영, 김미순, 정대진씨(왼쪽부터).  3 인공암벽을 운영하는 조경아씨.
 4 2007년 엘캐피탄 로스트 인 아메리카를 함께 등반한 후배를 그린 김지영씨의 수채화. 5 2007년 엘캡 등반 중 포터레지에 앉아 쉬고 있는 김세준씨.
1 올해 초 청송빙벽대회에서 15년 만에 만나 닭스클럽에 가입한 이승혜씨.왼쪽은 전양준씨. 2 올해 초 진동리에서 열린 설피 만들기 행사에 참가한 정은영, 김미순, 정대진씨(왼쪽부터). 3 인공암벽을 운영하는 조경아씨. 4 2007년 엘캐피탄 로스트 인 아메리카를 함께 등반한 후배를 그린 김지영씨의 수채화. 5 2007년 엘캡 등반 중 포터레지에 앉아 쉬고 있는 김세준씨.
5월 15일 서울 동대문 곱창집 모임은 제주 산악인 오경아(서귀포 백록산악회)씨에게는 첫 모임이었다. 등반 경력 20년에 클라이머 출신 남편 정상수씨와 함께 제주시에서 실내인공암장과 등산장비점을 운영하는 오경아씨가 닭스클럽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겨울 안나푸르나 원정 대비 한라산 훈련등반 때 만난 정은영씨를 통해서였다.

“3박4일 지내면서 동갑이란 걸 알았어요. 바로 말을 텄어요. 코드가 맞는 친구와 함께 해외 원정을 간다 생각하니 정말 좋았어요. 닭스클럽 얘기는 그때 처음 들은 거예요. 차일피일 미루다 이번에 대산련 전국등반대회에 심판으로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김에 참석한 거예요.”
김재문씨와 엄정배씨는 오경아씨가 자리에 앉자마자 “말 놔. 그래야 나도 말을 놓을 수 있으니까”라며 표정이 잔뜩 굳어 있던 오경아씨를 편하게 대해주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도착한 이승혜씨는 전양준씨의 소개로 올해 초 가입했다. 전양준씨와는 1994년 노량진클라이밍센터에서 운동할 때 인연을 맺은 사이.

“올 초 청송 빙벽대회 때 세팅하느라 한창 바쁜데 웬 여자가 이것 좀 들어봐 달라지 뭐예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죠. 곧 승혜씨라는 걸 알았죠. 회원들이 어디가 뻐근하다 하면 수지침도 놓고, 마사지도 해줘요. 3박4일이라도 해줄 여자예요. 그런데 승혜 넌 언제 시집 갈 거야?”

전양준씨의 한마디에 이구동성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어허, 결혼 얘긴 안 꺼내기로 했지? 집안 얘기도 그렇고.”

사생활 간섭은 금물. 닭스클럽은 놀러만 다니자고 만든 모임은 아니다. 원정 나가는 ‘닭’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해외 산에 대한 정보 교환과 신진 등반기술을 배울 기회도 많다. 닭스클럽은 창립 이후 지금까지는 분기별로 산행하는 것 외에 각자 소속 산악회 활동에 주력해왔으나 3년쯤 지나 해외 원정을 나가 볼까 생각 중이다.

“등반을 워낙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 어딜 가든 문제없겠지만 적당한 곳으로 갈 거예요. 그래야 모두 즐거울 테니까요. 닭들이 산보다 바다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닭들의 시골집도 찾고요. 점봉산 아래 진동리에 설피 만들러 간 적도 있어요. 아무튼 너무 좋아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혹은 기분이 안 좋을 때 한잔 하자고 번개 치면 열 명 가까이 모이니까요.”

김세준씨는 “앞으로는 만날 때마다 주제를 정해 얘기를 나누는 자리가 되도록 할 생각”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즐거움도 좋지만 작은 주제를 놓고 토론의 시간도 갖고 싶어요.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이나 단체와 자매결연을 맺어 도움을 주고 싶어요. 저희는 젊잖아요. 자, 다들 잔 들어 봐. 내가 한마디 하면 ‘위하여’를 외쳐야 해. 자, 닭스클럽과 창간 40주년을 맞은 <월간山>을 위하여!”


/ 글 한필석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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