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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르포ㅣ겨울 태백산] 천년 주목 설화경으로 황홀경

월간산
  • 입력 2012.01.3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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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직후의 유일사~천제단~문수봉 능선을 가다

태백산이 때 이르게 만화경 같은 설경을 선물했다. 아무리 눈 많기로 유명한 태백이라도 설국다운 설경은 12월 중순 지나 12월 말쯤 되어야 연출된다. 그런데 이번 겨울엔 한 달쯤 이른 11월 말부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상청은 11월 30일 강원 산간지역에 내린 폭설은 11월에 내린 눈으로는 역대 두 번째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했다. 태백산꾼 김부래(71·태백시 숲해설가)씨는 “아주 떡칠이 됐어!”라고 전화기 저편에서 외쳤다.

“그냥 눈이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게 아니라 온 나무에 일부러 가져다 붙인 거 같아. 비가 내리다가 눈이 내리고 폭풍설이 몰아쳤거든. 축축하게 젖은 나무에 그냥 팔뚝만 하게 들러붙은 거라.”

12월 5일 태백산 해발 1,500m대의 산릉에 만개한 설화와 상고대. 날씨가 차가워 햇살이 이틀여 비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12월 5일 태백산 해발 1,500m대의 산릉에 만개한 설화와 상고대. 날씨가 차가워 햇살이 이틀여 비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보기 어려울 태백 설경을 찾아 달렸다. 평창 지나고 정선 민둥산 입구께를 지나기까지도 설경은 고사하고 축 늘어진 봄 분위기더니 태백과 정선의 경계인 두문동재터널로 접어드는 순간 설국으로 변한다. 해발고도가 순식간에 대관령과 비슷한 800m대로 높아졌고, 더불어 며칠간 숲에 내린 눈은 그대로 남아 천지를 하얗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오후 늦었으나마 태백산 정상 능선의 일몰이 비춘 설화경을 보자며 서둘러 시작한 태백산 당골 산행은 예상치 못한 덫에 걸려 무위로 돌아갔다. 12월 4일 일요일 오후의 당골 길은 깊은 눈이 아닌 수많은 하산객들로 발걸음이 한없이 더디어져, 결국은 해가 저문 뒤에야 고드름이 주렁주렁 맺힌 망경사 처마에 설 수 있었다.

태백산 정상 비석과 천제단. 실제 태백산 최고봉은 이곳 북쪽 장군단이 축조돼 있는 해발 1,566.7m의 장군봉이다.
태백산 정상 비석과 천제단. 실제 태백산 최고봉은 이곳 북쪽 장군단이 축조돼 있는 해발 1,566.7m의 장군봉이다.

맑은 하늘 강한 햇살에
스러지지 않았을까 조바심
다음날 월요일, 아침 일찍 서둘렀다. 최초 목적지는 태백시 북쪽의 대덕산 설릉을 가보는 것이었다. 큰키나무는 전혀 없이 오로지 야트막한 초본으로만 뒤덮인 이 대덕산릉이 광대한 설릉을 이루었을 것이란 기대는 그러나 기대로만 끝나고 말았다. 대덕산 주등산로의 양쪽 수목 줄기들이 눈으로 축  휘어 지면에 머리를 박은 채 얼어붙어버렸던 것이다.

그 수백 개의 빗장을 일일이 풀며 전진하기란 불가능했다. 길 아래의 계곡도, 길 위의 산비탈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남달리 장사여서 포기라고는 모르는 천안 산꾼 맹헌영씨조차 30분이 지나지 않아 도저히 안 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대덕산 설릉 탐승은 헛심을 쓰는 것으로 끝났다. 눈이 깊어서가 아니라 산이 눈 덮인 나무로 빗장을 지르는 바람에 입산을 거부당하기는 난생 처음이다.

태백산 망경사 옆 용정 앞 제단에 밝혀진 촛불.
태백산 망경사 옆 용정 앞 제단에 밝혀진 촛불.

다시 태백산으로 차를 돌렸다. 여전히 대기가 쌀쌀해 안심은 되었지만, 그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다. 강한 햇살에 눈꽃이 모조리 스러지는 게 아닐까, 조바심이 인다. 어제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며, 오늘은 태백산 천년 주목의 설화 풍경에 포인트를 두고 유일사 코스로 올라 천제단을 거쳐 문수봉 돌탑 설경까지 보고 하산키로 했다. 그래야 서너 시간이면 끝날 것이란 예상은 그러나 그 갑절도 더 걸려, 어제처럼 랜턴을 켜고 하산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물론, 예상을 뛰어넘는 설화 풍경에 걸음이 지체된 탓이다.

월요일 오전의 유일사 입구 주차장은 한산했다. 손가락만 한 굵기의 체인을 네 바퀴에 모두 감은 사륜구동 차량 한 대가 선 당집 앞을 지나며 비로소 태백산중 품안에 든 느낌이 여실해진다. 대기는 상큼했고, 간혹 스치는 바람은 낙엽송 가지에 얹혔던 눈가루를 한줌씩 후르르 흩뿌린다.

장군봉 북쪽, 태백산에서 주목 경치로는 가장 빼어나다는 나무 앞을 태백 산꾼 김부래씨와 평택 장익진씨가 지나고 있다.
장군봉 북쪽, 태백산에서 주목 경치로는 가장 빼어나다는 나무 앞을 태백 산꾼 김부래씨와 평택 장익진씨가 지나고 있다.

여름이었다면 지루했을 비포장 임도는 무릎 넘게 쌓인 흰 눈으로 축복받은 길이 된다. 어제 대덕산과 같은 나뭇가지 빗장에 시달리는 일 없이 편하게 걸음을 옮기는 일행 얼굴 표정이 햇살 비친 눈밭처럼 환하다. 나뭇가지마다 소복하게 얹힌 설화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감탄하는 일행에게, 구슬땀을 흘리며 내리닫던 산행객들이 “저 위에 비하면 여긴 아무것도 아녜요”하면서 지나친다. 글쎄, 흰 눈을 얹고 파란 하늘에 마치 압화(押花)처럼 뚜렷이 미세한 잔가지까지 새기고 선 저 자작나무 자태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유일사로 이어진 짐 운반용 케이블카의 종점에서 찻길은 끝나고, 등산로 안내팻말 옆으로 천제단 오름길이 이어진다. 김부래씨는 50m쯤 오르다가 길 우측의 벼랑 위로 일행을 인도한다. 깊은 협곡 저 아래 흰 눈을 쓰고 앉은 유일사 당우들이 내려다뵌다. 대찰은 아니어도 풍성한 눈과 밝은 햇살, 수많은 탑파인양 절 주위를 장식하고 선 침엽수들로 12월 5일의 유일사는 그 어느 절보다 아름답다.

밤의 용정비각 처마와 ‘상고대 나무’.
밤의 용정비각 처마와 ‘상고대 나무’.

오전 햇살의 밝은 기운이 얹히며 천제단으로 이어지는 설화길은 밝은 축복의 길이 되었다. 시간도 넉넉하니, 이 길을 빨리 걸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일행은 제각각 자신을 매혹하는 풍경 속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사스래나무이거나 당마가목이기는 저 아래나 매한가지이지만 오를수록 눈꽃이 두터워지며 평범했을 숲은 몽유도원 같은 황홀경으로 변한다.

다행히도 날이 차가워서인지 정상 능선의 설화나 상고대는 햇살이 찬란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이틀 연이어 이 산을 오르는 김부래씨는 “어제 하고 거의 똑 같아” 하면서 길옆을 가리킨다. 해발 1,425m의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처음으로 태백산의 천년 주목을 만난다. 대부분 수목은 두터운 눈 무게가 힘겨워 고개를 꺾었지만 천년 주목은 스스로 머리에 얹은 화관인양 꼿꼿하고 당당하다. 천년 주목의 멋은 이렇게 두터운 적설을 얹고 상고대로 속속들이 치장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오늘 새삼 확인한다. 주목 가지의 그 분방한 휘어짐이나 구부러짐은 바로 수없이 많은 겨울날 적설의 무게와 드센 바람으로 이루어낸 것임을 또한 깨닫는다.

밤새 몰아친 바람이 빚은, 바람에 흩날리는 말갈기 같은 상고대. / 군더더기를 생략한, 짤막하고도 강렬한 싯귀 같은 태백산 고사목 상고대.
밤새 몰아친 바람이 빚은, 바람에 흩날리는 말갈기 같은 상고대. / 군더더기를 생략한, 짤막하고도 강렬한 싯귀 같은 태백산 고사목 상고대.

설화 만발한 설릉 아래에선
기화요초가 봄 기다려
해발 1,500m대를 넘어서며 비로소 수목 위로 조망이 터지기 시작한다. 주변 산의 맹주로 솟은 해발 1,566.7m 태백산릉에서의 광대무변한 조망에 온갖 기이한 설화 풍경이 섞인 희귀한 풍경을 맛볼 수 있음에 일행은 또한 추위도, 시간도 잊는다. “밥들 안 먹을 기여?”오늘이 두 번째여서 이미 시들한 김부래씨가 기어이 참다못해 한마디 한다. 어느새 정오를 지나 오후 1시에 가까웠다.

숲속 어느 아늑한 곳을 찾아 요기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또 설화 탐닉을 이어간다. 햇볕을 등지고 서서 먼 산릉들과 섞어 음미하다가, 뒤돌아서서는 설화 사이로 역광의 빛줄기가 투과해 나오는 오묘함에 감탄하기도 한다.

웅기중기 모여서서 먼산 바라기를 하는 태백산 정상능선의 상고대.
웅기중기 모여서서 먼산 바라기를 하는 태백산 정상능선의 상고대.

상고대가 붙은 방향을 보니, 이번 태백산 설화 풍경은 동남풍이 빚어낸 것임을 알겠다. 마루금을 넘자마자 기운이 풀어진 동남풍이 풀풀 눈가루를 흩날렸을 능선 서사면으로 한 발 나서자 아하! 거기엔 지상의 온갖 형상들이 모두 모여 있다. 하늘 향해 짖는 강아지, 부둥켜안은 연인, 괴로워하며 몸을 비트는 듯한 괴수 형상까지.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평범한 나뭇가지들도 저마다 한껏 요술을 부렸다.

이 능선은 초여름부터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김부래씨가 말한다. “여긴 태백제비꽃, 노랑무늬붓꽃, 한계령풀이 지천이여. 둥근이질풀 군락도 있고.” 두터운 눈 저 아래에서 그 야생초들은 봄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저 기이한 온갖 설화들은 그 야생초들의 꿈을 드러내는 겨울 현몽이다. 일행은 그 야생초화들의 꿈 위를 꿈결처럼 지난다.

문수봉 쪽 길가에서 또 만난, 상고대 주목. 저 뒤의 천제단이 선 태백 주릉과 어울린 풍치가 각별한 곳이다.
문수봉 쪽 길가에서 또 만난, 상고대 주목. 저 뒤의 천제단이 선 태백 주릉과 어울린 풍치가 각별한 곳이다.

태백산 최고의 주목 조망처라는 곳에 다다른다. 사람 많은 휴일에는 더 이상 들어가면 안 되는 산중 포토라인까지 그어진다는 곳이다. 완경사면 저 아래 마치 오랜 부부인양 거대 주목 두 그루가 장대한 동쪽 산하를 배경으로 선 곳이다. 가지마다 상고대가 수염인양 갈기인양 허옇게 붙어 기경을 이루었다.

이제 볼 것 어지간히 보았다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태백산 최고봉인 장군봉 정상에 서자 저 앞 태백산 최대의 제단 천제단까지 펑퍼짐하게 퍼지며 펼쳐진 태백산 정상 능선이 설원으로 눈부시다. 실제 최고봉은 이곳 장군봉이지만 사람들은 저기 1,560.6m봉 위의 천제단이 선 곳을 정상으로 여긴다. 태백산릉의 제단은 모두 세 개다. 태백산 최고봉인 장군봉 정상에 있는 것이 상단 장군단이며, 그 아래로 중단인 천제단과 하단이 차례로 늘어섰다. 제단의 크기로 보나 역사로 보나 천제단이 이 세 개 단 중 으뜸이다.

장군봉 북쪽의 두 그루 거대한 주목 뒤의 풍경. 사방 어디건 만화경 같은 설화 풍경으로 가득차 있었던 12월 5일의 태백산이었다.
장군봉 북쪽의 두 그루 거대한 주목 뒤의 풍경. 사방 어디건 만화경 같은 설화 풍경으로 가득차 있었던 12월 5일의 태백산이었다.

갑자기 귀청이 찢어질듯 굉음이 머리 위를 스친다. 태백산 서쪽 아래 계곡의 표적을 향해 전투기들이 폭격 연습을 하고 있다. 그 굉음 한 번에 설화가 모조리 우르르 떨어질 것 같지만, 미동도 없다.

저문 뒤였으나마 망경사는 어제 보았으니만큼 일행은 미련 없이 문수봉 쪽 길로 접어든다. 길은 나 있으되 역시 통행이 적은 탓인지 간혹 눈가루가 묻은 잔가지들이 얼굴 앞을 가린다.

문수봉까지는 금방일 것 같았는데, 어제 오후의 ‘과속 산행’에 이어 아침에 눈 깊은 대덕산 나무 빗장 길에서 용을 쓴 탓인지 걸음걸이들이 늘어진다. 문수봉 쪽 길로 가는 도중에도 천년 주목이 몇 그루 더 뿌리내리고 있다. 주름지며 선 주목 줄기는 저기 지하 깊숙한 석회동굴의 커튼형 종유석과 흡사하고 가지에 만발한 설화나 상고대는 석화(石花)와 영락없이 빼닮았다. 조물주의 손길은 지상이나 지하이거나 다를 바 없이 조화롭다.

사람 손으로 큰 수술을 받은 태백산 주목 노거수가 오랜 만에 가지마다 상고대로 멋을 냈다.
사람 손으로 큰 수술을 받은 태백산 주목 노거수가 오랜 만에 가지마다 상고대로 멋을 냈다.

문수봉에서 돌집 짓고 수행하던 여인
해발 1,517m 팻말과 돌탑이 선 문수봉에는 아무도 없다. 15년쯤 전 늦가을인가, 여기 문수봉에 올랐을 때는 놀랍게도 돌탑 옆에 작은 봉분만 한 돌집이 있었다. 가로 세로 각각 1.5m 정도의 두터운 종이와 비닐로 뒤덮인 그 토굴 위에는 ‘죄송합니다. 무언기도 중입니다. 안에 사람 있습니다’라고 쓰인 팻말이 놓여 있었다.

마침 그 주인인, 미군용 얼룩무늬 재킷을 입은 깡마른 여인이 밖으로 나와 돌탑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바로 저 토굴 속에서 수도 중인 분이냐고 묻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하지 못하여 굽고 처지고 간혹 부러지기도 한 나뭇가지 덕분에 상고대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완전한 것이 된다.
완전하지 못하여 굽고 처지고 간혹 부러지기도 한 나뭇가지 덕분에 상고대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완전한 것이 된다.

40대 후반쯤 되었을까. 망경사 사람들 말로는 자식 둘을 친척집에 맡겨 놓고 1년 수행 예정으로 올라왔다는 여인이었다. 왜, 무엇이 얼마나 절절하기에 이런 고행을 하는 것인지 정녕 궁금했지만 여인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입니다’라고 취재 노트에 써서는 되돌려주었을 뿐이다.

주변 돌을 주워 돌탑을 쌓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문수봉 정상에는 아무도 없다. 휑하니, 겨울바람이 돌탑을 한 바퀴 휘감고는 사라진다.

어떤 나무에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쌓이든, 언제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태백산 설화 풍경.
어떤 나무에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쌓이든, 언제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태백산 설화 풍경.

그나저나, 저 위 설화 만발한 능선에서 너무 노닥거린 탓에 하산길이 아무래도 또 저물게 생겼다. 걸음을 빨리해 보지만 역시나, 능선에서 벗어날 즈음 빠른 속도로 땅거미가 눈밭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북쪽 한국 최고령이라는, 둥글게 속이 팬 주목 줄기 속을 건성으로 들여다본 뒤 하산길 걸음을 잇는다. 아무리 캄캄한 밤이어도 겨울 눈 쌓인 태백산에서는 사람 족적이 뚜렷하니 길 잃을 염려가 거의 없다. 다만 지루할 뿐이어서 걸음을 서두른다.

무릎이 시큰하게 저려올 무렵 어둠으로 묵직하게 덮인 당골공원 아래 음식점가에 다다른다. 식당에 들어앉자 온몸에 배었던 밤의 냉랭한 기운이 후욱 빠져나간다. 문득 15년 전 그 때 100일 기도 중이던 문수봉 여인에게 지금의 이 따스한 공기를 보내주고 싶어진다. 

장군봉~천제단 간 태백산 설릉.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별볼일 없었던 나뭇가지들조차도 요정처럼 화사하게 다시 태어났다.
장군봉~천제단 간 태백산 설릉.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별볼일 없었던 나뭇가지들조차도 요정처럼 화사하게 다시 태어났다.

 

무속의 성지 태백산
매일 수많은 기도객들 천제단 찾아

태백산은 무속(巫俗)의 성지(聖地)다. 매일 수십 명의 기도자들이 들고나곤 한다. 태백산 정상 동쪽 아래의 사찰 망경사(望景寺) 요사채는 늘 이 기도객들로 북적거린다.

태백산은 북한산이나 계룡산처럼 애기빌이의 대상이 되곤 하는 기암봉이 솟아 있는 것도 아니다. 해발 1,567m로 높이만 좀 높을 뿐 함백산이나 소백산, 가리왕산 등 이 땅의 여느 육산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외양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태백산으로 유난히 많은 기도객들이 찾아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수봉 돌탑. 문수봉은 태백산의 주요 기도처 중 하나다.
문수봉 돌탑. 문수봉은 태백산의 주요 기도처 중 하나다.

태백산정에는 역사가 이미 2,000년이 넘었다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다. <환단고기>에 보면 ‘5세 단군 구을(丘乙) 임술 원년에 태백산에 천제단을 축조하라 명하고 사자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고 기록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으로, 중사(中祀)의 제를 올리던 곳’이라고 전한다. 모두 옛적에는 이 산을 신성시했음을 전하는 기록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들도 수많은 기도객들이 찾아드는 현상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기는 어렵다. 무속인들은 “이 산을 많은 기도객들이 찾는 이유는 이 산에 임하는 영이 유난히 많고 신령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산은 나라 산이라 국사신들이 주로 내려와요. 단군할아버지와 그 위의 환웅천황, 그리고 곧 하느님이신 환인천제까지도 임하십니다. 주산신(主山神)은 저기 단종비각이 모셔진 대로 단종대왕이시고, 저기 법당 앞에 있는 샘 용정(龍井)에는 용왕신이 임하신답니다. 세종대왕신과 그밖에 여러 장군신도 이 천제단 주변에서 주로 임하는 신이죠. 저기 동쪽에 있는 바위봉 문수봉은 대개 기도를 마무리짓는 곳인데, 거기는 이 도량을 지키는 신장(神將)들이 많이 있어요.”

무속인들은 대개 10월에 가장 많이 찾아온다. 기도는 천제단과 장군봉, 문수봉, 단종비각, 그리고 용정까지 여섯 군데에서 주로 한다. 그밖에도 산 여기저기 은밀한 토굴이나 기도처가 무척 많다고 한다. 사람마다 영험하다는 데도 제각각 다르다. 기도하는 방식이나 대상도 그야말로 천신, 만신 등 천차만별이지만 대개 낮 기도보다 밤 기도, 특히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많이 하고, 아무래도 숙소인 망경사에서 가까운 천제단으로 많이 올라간다. 밤늦게 천제단에서 징소리가 울리곤 하는 이유다. 천제단은 지름 약 8m(둘레 28m), 높이 2~2.5m의 돌담이 둥글게 쌓여 있고, 그 안에 제단이 있다. 여기서 밤을 새는 이도 있다. 어느 무속인은 이렇게 말한다.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원해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두들 신이 시키는 대로, 어쩔 수 없어 올라온 겁니다. 얼굴을 잘 살펴보세요. 얼굴에 그림자가 진하지요. 어떤 사람은 흡사 반은 죽은 사람 같아요. 100퍼센트, 그저 하산한 뒤 일이 잘 풀리게 해달라고 기원하러 왔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조선 성종대의 학자 성현의 <허백당집>에 보면 ‘삼도(三道;강원, 경상, 충청도)의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천왕당을 지어 단군 상을 모셔놓고 제사하는데, 철 따라 천제를 모시고자 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깨가 서로 부딪치고, 앞서 가는 사람의 발뒤꿈치를 밟을 정도’라고 당시 천제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태백산 주변에는 굿을 지내는 당집이 여전히 많다.

12월 5일 오후의 천제단. 눈보라가 동남풍과 더불어 몰아친 탓에 제단 동쪽 울 바깥에 허옇게 상고대가 붙었다.
12월 5일 오후의 천제단. 눈보라가 동남풍과 더불어 몰아친 탓에 제단 동쪽 울 바깥에 허옇게 상고대가 붙었다.

산행 길잡이
유일사~천제단~문수봉 능선 설화풍경이 최고

태백지역 폭설 소식이 들리면 바로 태백을 향해 출발, 그 다음날 산행해야 최고의 눈꽃을 볼 수 있다. 산행은 유일사→천제단 방향이 우선 최상이다. 그 후 천제단에 이르러 망경사→당골광장 아니면 문수봉→당골광장 코스를 잡는다. 문수봉→당골광장 길이 조금 더 길고 험하며, 문수봉 쪽의 천년 주목 설경을 천제단 쪽 산릉을 배경으로 보는 맛이 색다르다. 유일사매표소~천제단~문수봉~당골광장 코스는 약 13km에 6시간쯤 잡으면 된다. 이렇게 코스를 잡을 경우는 자가용 차량을 하산 예정지점인 당골광장에 먼저 가져다두고 유일사매표소 쪽으로 택시나 버스로 돌아가 산행을 시작한다. 하산 후 한 사람이 차를 가지러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기다리고 하는 일이 번거롭다. 단 눈축제 기간엔 주차장 사용이 어려우므로 대중교통편을 이용한다.

천제단에서 망경사~반재~당골광장 코스는 문수봉 쪽보다 2km쯤 짧고, 사찰이라기보다는 무속인들의 숙소라 할 망경사와 명수(名水)로 꼽히는 용정 샘물을 맛보는 멋이 있다. 반재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백단사로 하산해서 유일사 입구 주차장까지 걸어갈 수도 있지만(약 1.5km) 한겨울에는 좀 추울 것이다.

혹 뜻밖으로 길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 랜턴은 반드시 챙긴다. 눈길은 랜턴이 없으면 굴곡이 뵈지 않아 실족하기 십상이다. 바닥에 눈이 붙지 않는 아이젠과 랜턴은 필수다. 보온병에 넣은 따끈한 물 한잔은 추울 때 원기회복에 최고다.

올겨울 태백산 눈축제는 ‘눈으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를 주제로 1월 27일부터 2월 5일까지 10일간 열린다. 이 축제를 위해 태백시는 1월 10일경부터 눈축제 대표 프로그램인 눈 조각 제작을 시작한다. 이번에 설치할 눈 조각은 태백산도립공원 당골광장 38점, 시내 26점 등 모두 64점이다.

주행사장인 당골광장은 길이 15m, 폭 10m, 높이 7m의 러시아 궁전을 중심으로 천제단 선녀, 2012년 용, 불멸의 이순신, 십이지신상 등 상상의 판타지 스토리 존으로 꾸며진다. 옛 마장공터 아래 광장은 스파이더맨, 디 워, 킹콩, 조스, 트랜스포머, 스타워즈 등 영화 속 주인공으로 가득 찬다. 태백산도립공원 입구인 제1주차장에서는 아기공룡 둘리, 로봇 태권 V, 은하철도 999 등 만화영화의 귀여운 캐릭터들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눈 조각 전시장을 올해는 도심까지 확대한다. 태백시내 중심 황지연못에는 세계 유명 캐릭터가 눈 조각으로 재현되며 태백역 인근 태백관광안내소와 노동부 옆 주차장에도 눈 조각 전시장이 마련된다.

교통 대중교통
서울→태백
  동서울터미널에서 20분~1시간 간격(06:00~23:00) 운행. 3시간10분 소요. 2만1,600원(심야 2만3,800원). 문의 ARS 1688-5979. www.ti21. co.kr, 태백터미널 033-552-3100.청량리역에서 태백행 무궁화호 열차  07:00, 08:50, 12:00, 14:00, 16:00, 23:00 출발. 요금 1만4,600원. 문의 1544-7788.

태백→당골  태백시외버스터미널(033-552-3100)에서 노선버스가 40분~1시간 간격(07:38~22:25) 운행. 당골 출발 막차 22:45.

태백→유일사 입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영암운수 노선버스가 1일 22회(06:25~22:10) 운행. www.버스타자.com에서 태백시 각 방면 노선 검색이 가능하다.

택시 당골 8,000원(자정~새벽 4시 50% 할증), 유일사 1만 원, 화방재(어평재) 1만4,000원. 문의 태백 고원택시 033-554-1414, 553-2121.

자가용  중앙고속도로 서제천나들목~38번(5번 공용)국도~제천으로 간다. 유일사 입구로 바로 갈 경우는 제천~영월~녹전으로 이어지는 31번국도를 탄다. 태백시내로 일단 들어가려면 제천~영월~신동 ~사북~두문동재터널을 지나는 38번국도가 4차선으로 직선화돼 있어 훨씬 빠르다.

숙박(지역번호 033) 태백시가 운영하는 당골 태백산민박촌(033-553-7440~1)이 우선 권할 만하다. 15동 73실 규모로 이용료(성수기/비수기)는 콘도식 개인형 원룸 2인실 4만5,000원/3만5,000원, 가족형(49.5㎡, 6명 기준) 7만5,000/5만5,000원, 가족형(59.4㎡, 6인 기준) 8만 원/6만 원, 단체형(105.6㎡, 13명 기준) 13만 원/9만 원. 비수기는 2~4월과 9월, 11월이며 토요일 및 법정휴일 전날은 성수기 요금 적용. 식기를 비롯한 조리기구와 세면도구는 지참해야 한다. 예약은 홈페이지(minbak.taebaek.go.kr)를 통해 받는다. 당골공원 일원에 민박을 겸하는 식당인 고원가든(552-8471), 공원휴게식당(552-6001) 등이 있다.

태백시내 황지동에 최근 리모델링을 한 썬모텔(554-4338)을 비롯해 고운정여관(552-5485), 그랜드장(552-1737), 대현장(552-3040), 동경여관 (552-3454), 삼호장(552-4500), 연화여관(552-3334), 황지장(552-4230) 등 수십 개 여관이 있다(태백시 홈페이지 taebaek.go.kr 숙박편 참조).

맛집(지역번호 033) 태백시 주민들이 요즈음 주로 찾는 태백한우 전문점은 태백한우골(554-1299)이다. 당골 집단시설지구에는 고려뚝배기(552-2440)와 공원산채식당(552-1215) 등이 있다. 태백산 당골광장 오름길목인 삼거리의 무쇠곤드래밥집(553-2941)은 숨은 별미집이다.

맛나분식(552-2806) : 만두와 쫄면 전문인 30년 전통의 서민적 별미집이다.  2인분부터는 태백시내 어디든 배달해 준다. 꿩만두, 김치만두, 김밥도 한다 .
24시해장촌(553-3337): 밤새도록 하는 해장국 전문집. 뼈다귀·선지·우거지·콩나물해장국 각 5,000원.

너와집(553-9922) : 120년 된 너와집을 해체, 복원한 것으로, 1995년 개업 후 태백의 명물이 되었다. 돌솥밥 1만9,000원, 비빔밥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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