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기행 | 셰르파족 ①] “라이족은 짐 지고, 구르카족은 군대, 셰르파족은 산으로”

[520호] 2013.02
  • 글·사진 | 오영훈 월간산 기획위원·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산악회 OB
    입력 2013.02.05 10:21

    ‘셰르파 마을’ 왈룽을 찾아서

    기지개 켜듯 굽었던 허리를 펴며 소형 쌍발 비행기의 이동식 계단 위에 올라서자 숨을 턱 막는 후텁지근한 공기가 나를 맞아준다. 구겨진 짐짝처럼 한 시간을 날아온 이곳은 해발 487m 툼링타르. 세계 5위 고봉 마칼루(8,463m) 캐러밴 기점이자 네팔 북동부의 산쿠와사바 지역의 유일한 공항이다. 강가 너른 분지에 펼쳐진 소박한 활주로 옆에는 조그만 건물 두어 채가 공항 건물인 듯 서 있고, 주변엔 정글마냥 온통 초록빛 수풀이 펼쳐졌다.

    “대장님!”

    익숙한 얼굴이 저 멀리 철문 뒤로 마중 나온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손을 흔든다. 텐디가 예의 개구쟁이 미소를 짓고 서 있다.

    “임마, 이젠 대장이 아니잖아!”

    허나 그게 익숙한 모양이다.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 할까 하다가 내버려 둔다. 하긴, 무언가 변하지 않은 게 있을 때에야 변한 게 무엇인지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시골 동네엔 안 어울리게 깨끗이 빨아 입은 원색 티셔츠에, 빨간 운동화에 흙이라도 묻었나 연신 돌이켜보는 스물세 살의 텐디가 아직 사춘기처럼 보인다. 하기야 인생살이 전체가 사춘기가 아닐까. 이미 30대 중반이긴 해도, 산에 들어가 산다고 작정하는 나 역시 사춘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아마랑 아주머니 댁.

     발을 소중하게 여기는 네팔 현지인들

    목적지인 왈룽마을까지는 사흘 걸린다고 한다. 지난 봄 에베레스트 등반 때 인연을 맺은 ‘세븐 서밋 트렉’ 사장 밍마 셰르파의 고향 동네다. 밍마는 내가 셰르파와 히말라야 등반을 연구한다고 했더니 대뜸 자신의 마을을, 게다가 자기 집에서 묵으라며 소개시켜 줬다. 동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줄까?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나? 모든 게 막연하기만 한데, 다행히 지난 등반 때 고용했던 텐디는 밍마의 조카이기도 하고, 얼마 전 한국에 1년가량 외국인 근로자로 일했던 덕분에 한국말을 썩 잘해서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다.

    툼링타르에서 오늘의 목표 지점인 칸트바리(1,160m)까지는 고작 걸어서 두 시간 거리지만 공항 앞에는 큼직한 지프가 대기하고 있고 같은 쌍발기에서 내린 동네 사람들은 서슴없이 다시 짐짝처럼 구겨지듯 지프에 올라탄다. 몬순으로 길은 온통 진창이었고 그냥 걸어가자면 발은 엉망이 될 게 뻔했다.

    ‘어차피 지저분해질 발인데 좀 더럽히면 어떤가’ 했는데, 가만 보니 사뭇 발을 깨끗이 하는 게 풍속인 듯했다. 셰르파만이 아니라 모든 네팔 사람들에게 발은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서로의 발을 실수로라도 건드리면 꽤 무례한 일이 되고, 심지어 앉거나 누워 있는 사람의 발 부분을 넘어가면 안  된단다. 나에게야 끝없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는 게 훨씬 못 이길 일이었지만, 진흙탕 길이야말로 이들에겐 더 끔찍한 길 같았다.

    지프가 내려다 준 칸트바리는 작지만 그래도 이곳 산쿠와사바 지역의 수도다. 좁은 콘크리트 포장도로 양옆으로 2층짜리 건물이 수백 미터는 줄지어 서 있고, 초·중학교(10학년까지), 병원, 약국 등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장도 선다.

    해발 1,000m 즈음에는 쌀농사가 한창이다. 계단식 논에서 쟁기질을 하는 촌로.
    텐디는 상점 주인이자 지프 버스 사장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소란스럽게 실랑이를 벌인다.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지프 운전사는 왜 차삯을 안 내느냐는 것이고, 텐디는 아까 짐 내릴 때 냈지 않느냐고 발뺌을 한다. 결국 두 명 삯으로 500루피를 던져주고 나온다. 한 명당 500루피라고 했는데.

    이튿날에는 작달막하지만 단단하게 생긴 셰르파 한 명이 숙소로 찾아왔다. 마을에서 이미 장을 본 텐디와 내 짐을 합쳐 하나로 만들더니 먼저 성큼 길을 나선다. 왈룽의 같은 마을에서 함께 내려온 동네 형 ‘따시’라는데 우리 짐을 들어 줄 짐꾼이란다.

    칸트바리에서 왈룽까지는 현지 사람 걸음으로 이틀을 꼬박 걷는다고 했다. 다른 볼일을 보러 텐디와 동행한 두 여동생 마일리(둘째 여자형제란 뜻의 네팔어), 깐치(막내 여자형제)와 함께 걷는다.

    네팔은 103개나 되는 종족들이 뒤섞여 사는 다종족 국가로, 국교는 힌두교이지만 온갖 민간신앙이 혼합된 다종교에, 또 네팔어 외에 자기 종족들끼리만 통하는 종족어가 따로 있다. 이들 각 종족들은 분명 힌두교식 카스트로 서로를 구분해 살아가는 문화나 환경이 다를 뿐만 아니라 직업 또한 다르다.

    내 눈에는 엇비슷해 보이기만 한데, 산골로 걸어 들어갈수록 처음엔 브라만과 치트리족, 라이, 림부, 구룽, 타망, 네와르, 보테족 등 종족별로 모여 사는 마을들이 달랐다. 티베트 고산족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셰르파족은 산꼭대기에서 지내니 어쨌든 이들을 모두 지나쳐야 하는 셈이다.

    비슷해 보이기만 하는 사람들도 같은 족속 내에서는 친근하지만 서로 다른 종족 간에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마저 달라서 말 그대로 소 닭 보듯 한다. 까닭 모를 불신이 종족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것 같다. 마일리와 깐치는 텐디가 없었다면 산골 마을에서 내려오는 다른 친척을 찾아봐야 했을 것이다.

    탕게 밭에서 만난 텐디의 장모. 비닐을 우비처럼 썼다.
    열일곱 난 마일리는 걸음이 너무 뒤뚱거리기에 가만 보니 발가락이 여섯 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종일 걷는 거리가 버거워 보인다.

    “깡발라 수이게꺼 마야꺼(발 아파 안 아파)?”

    텐디는 그래도 오빠인지라 동생을 보살핀다. 아직 열세 살 어린 깐치와 여러 번 가방을 바꿔 멘다. 칸트바리를 지나 시골 마을길로 접어드니 어느새 깨끗하던 청바지에서 티베트 전통 치마로 바꿔 입었고, 그제야 좀 편하단다.

    저 멀리 흰 산들이 몬순 구름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한 첫 날은 왈룽마을이 반대편 산언덕으로 보이는 무레(2,002m)까지 걸었다. 오락가락하던 먹구름이 저녁 나절 드디어 한바탕 소나기를 쏟아 부었다. 비를 피해 길가의 허름한 오두막에 들어서니 보테족 여인 둘이 살고 있다. 보테족은 셰르파처럼 티베트에서 분지해 내려온 종족인데 셰르파보다 늦게 내려 왔고(18~19세기), 셰르파보다 하등한 종족으로 여긴다.

    오며 가며 들른 집에선 어디가나 술을 내온다. 맥주는 찾아볼 수 없고 창(막걸리)이 기본인데, 집안 여인들이 수수나 감자로 담근다. 집집마다 맛도 제각각이니 사람들은 창 맛으로 그 집 사람들이 얼마나 음식 솜씨가 좋은지, 잘 사는지, 심지어 해코지를 하는 사람들인지 아닌지를 따질 정도다. “저 집 창은 먹지 마세요” 하면 셰르파들 사이에선 가장 심한 뒷담화 정도 된다.

    오늘 이 집엔 창 외에 락시(소주)까지 갖췄다. 냄비 두 개를 엉성하게 연결해 증류한 탓에 쌀뜨물같이 뿌연 소주를 두 컵 거푸 마시니 금방 취기가 오른다. 비에 젖은 몸에 열이 오른다. 늦은 달밧(네팔식 백반)을 청해 먹고 구석진 곳에서 거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다.

    한 이불을 덮은 텐디가 자꾸 껴안길래 좀 불편하기도 하고 불쾌한 감도 있어 자는 동안 몇 번을 깼는데, 가만 둘러보니 모두 서로 껴안고―물론 동성끼리―잔다. 확실히 껴안으면 따뜻하다. 따뜻한데 나는 왜 그를 밀쳐냈을까?

    거머리에 시달리며 아룬강 건너 셰르파 마을로

    이튿날은 아룬강을 향해 한참을 내려간다. 오늘부터 거머리 소굴이라는데, 아니나 다를까 낌새가 이상해 설마 하며 열어 본 샌들 안쪽에 온통 거머리가 들러붙어 있다. 비명을 지르며 떼어내는데, 그게 쉽지 않다. 피는 또 왜 그렇게 많이 나는지! 뭔가 두려운 예감이 찾아든다.

    아룬나디의 포효하는 물살과 출렁다리.

    한참 내려가다가 만난 아마랑마을의 민가 두어 채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적어도 집 마당에는 거머리가 없겠지. 텐디는 어딜 가나 아는 사람이 많다. 이번엔 주인아주머니가 자기 어머니의 오랜 친구라고 한다. 셰르파는 아니고 라이족이다. 초로의 남편과 열두어 살 남짓한 아들 하나, 젖먹이를 둔 20대 초반의 부부, 그리고 벙어리인지 말 못 하는 인도인과 함께 한 방에서 살면서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었다. 입심이 센 아주머니는 역시 창을 말아 주면서 점심을 대접한다.

    “이제부턴 텐디 말고 ‘제타’라고 불러요, 대장님.”

    제타는 첫째 남자형제라는 뜻이다. 여기선 좀체 ‘이름’을 안 부르고 첫째, 둘째 … 막내라는 식의 순서로 부른다. “첫째야!”, “막내야!” 어느 집의 막내인지는 상황에 따라 알아들어야 하고, 때로는 ‘제타 텐디’처럼 이름을 붙여 부르기도 한다. 결국 그들의 이름은 필자도 모르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니, 독자들께서도 상황에 따라 알아듣길.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강인 아룬강은 200m는 될 듯한 출렁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마치 용이 몇 마리 괴성을 지르며 지나가듯이 쇠줄 다리 아래로 누런 흙탕물이 포효하며 지나간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다리를 건너면 왈룽 지역이다. 해발 2,000m에서 800m까지 내려왔고,  다시 2,000m대까지 가파른 길을 올려친다. 오후의 뜨거운 햇살은 지독하다 못해 어지럽다. 고작 몇 시간 차이 안 나는 곳인데 위아래가 그렇게 차이가 날까.

    “야, 제타!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해?”

    “야~ 유루!(저~ 위쪽이에요)”

    치칠라(1,840m) 마을에 전봇대 공사가 한창이다. 이제 이곳에도 전기가 들어올 날이 멀지 않았다.
    가만 보면 어디를 둘러봐도 ‘저 위, 저 아래’만 있을 뿐 도무지 평지란 없다. ‘평지’란 개념이 있기나 할까? 하다못해 옆집에 놀러 가려 해도 가파른 돌길 흙길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나에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히 평평한 평지여야 했고, 이런 오르막은 여전히 힘에 부치기만 한, 왠지 불안해 지나가 버리고 싶은 곳이었다.

    “와! 탕 체숭!”

    제일 먼저 내 입에 익은 셰르파 어(語)는 힘들다는 뜻이었다. 물론 힘들기는 나나 셰르파나 마찬가지다. 한 짐 지고 가는 ‘까일라’(넷째 남자형제) 따시는 장딴지 어딘가가 아프단다. 비상약이라고 한 줄 들고 온 아스피린 한 알을 꺼내 그에게 건넨다. 셰르파들은 자신들을 야크에 비유한다. 고산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지만 해발 3,000m 아래로 내려가면 힘을 못 쓰고 결국엔 ‘더워서’ 죽어 버리고 만다는 야크. “라이는 짐을 지고, 구르카는 군대로, 셰르파는 산으로 간다”는 말을 즐겨 한다.

    마칼루산으로 오르다가 중간에 빗겨 서 있는 왈룽 지역은 최근 네팔 히말라야에서 고산등반을 많이 하는 셰르파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 아래 두 마을 지미가옹과 탕게를 지나 오르면 드디어 셰르파 마을들이 나타난다.

    무레를 지나면서 한참 가야 두어 채씩 집이 나타나곤 했다. 빈집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카트만두로 온 가족이 나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집들. 셰르파들 중에는 유난히 상경한 일가가 많다고 한다. 지미가옹과 탕게는 여전히 후텁지근, 여름인 탓도 있겠지만 가축 분뇨 냄새도 심하다. 라이족이 주로 사는데, 텐디는 그래도 아랫마을 사람들이어서인지 다들 아는 척한다.
    네팔의 북부 지방 일대에는 티베트 문화권 아래 불교도들이 많다. 셰르파족만이 아니라 구룽, 타망족 등도 티베트 불교를 신봉한다. 사진은 구룽족 곰파(절).

    “밭 참 넓다!”

    땀을 뻘뻘 흘리며 두어 집뿐인 탕게를 벗어나자 넓은 옥수수밭과 수수밭이 펼쳐진다. 밭 귀퉁이서 등만 내놓고 엎드려 일하던 촌로를 향해 텐디가 소리 질러 부른다. 맨발에 이가 없는 할머니가 손을 툭툭 털더니 우리를 맞아 이끈다. 텐디의 장모다. “후두둑”, 어김없이 오후가 되었음을 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이어진다. 쓰기 편한 검정 비닐 포대가 이곳에선 우산인가보다. 텐디의 장모는 왈룽의 셰르파 첫 마을 앵루와에 산다.

    “건데 뻬따 와딱!(거머리가 너무 많아요)”

    들른 집마다 샌들을 벗어 던지고 덕지덕지 붙은 거머리를 떼어내며 버릇처럼 내뱉는 인사말이 되어버렸다. 이곳 해발 1,500m 이상의 아고산지대는 여름 우기만 되면 수많은 거머리가 출현한다고 한다. 진창길이라도 지날라치면 너무도 두려운 마음뿐이다. 아무리 이곳에서 여름을 몇 번 지낸다 해도 그 꿈틀거리는 거머리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궁금증은 커져 가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져

    옥수수밭을 지나 올라 드디어 셰르파 마을에 들어섰다. 이미 내 발은 거머리에 피투성이가 되었고,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오늘은 장모님댁에서 자고 간단다. 짐을 져 준 까일라 따시에게는 짐 속을 뒤적거리더니 텐디가 카트만두에서 새로 받아 온 티셔츠 하나를 꺼내 주는 게 끝이다.

    장모님댁은, 셰르파들의 집이 다 그럴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봐 온 다른 종족의 집들과는 꽤 달랐다. 흙바닥 대신 널찍한 마루에 깨끗한 화덕을 가운데 두었고, 서늘한 기온 탓인지 벌레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거머리도 집에는 보이질 않는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마칼루 왈룽 위치도
    텐디의 장모는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그중 둘이 모친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자들은 보이질 않는다. 큰딸(제티)은 미국인과 결혼해 이민 갔고, 넷째(까일리)는 일찍 죽었단다. 둘째(마일리)는 내 최종 목적지인 밍마의 바로 아랫동생인 나왕 겔젠(사일리, 셋째)과 결혼해 윗마을 누르부짜울에 살고 있다. 막내(깐치)인 니마 부띠는 열다섯 살인데, 칸트바리 중학교에 다니던 중에 마침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 있는 중이다. 영어를 썩 잘해 그나마 간만에 시원하게 대화가 된다.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텐디는 이상하게 긴장한다. 자기 부인은 다른 남자 따라 나가서 없다고 하는데, 장모의 딸은 분명 다섯이라 했고, 그중에 셋째 딸(사일리)이 젖을 먹이던 두 살배기 아이를 자기 아들이라고 자랑하는 건 또 뭔가. 유난히 다소곳해 보이는 사일리 역시 텐디에게 일부러인지 아는 척을 안 한다.

    궁금증은 커져 가는데, 너무 피곤한 탓에 창 두어 잔에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진다. 외국인이 왔다고 동네 사람들 여럿이 와서 창을 몇 순배 돌리는데 나는 고개가 자꾸 끄덕거린다. 부끄러움인지 미안함인지도 모르게, 꼭 좋아서만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편해지듯 깊은 잠에 빠진다. 고된 사흘은 순식간에 지나갔다.(계속)

    필자 오영훈

    본지 기획위원, 서울대 농생대산악회 회원. 에베레스트를 3회, 트랑고타워, 악수 등을 등반했으며 대한산악연맹 학술정보위원, 코오롱등산학교 강사 등으로 있다. 서울대에서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UCR)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수료) 중이며, 고산등반 가이드로 알려진 네팔 셰르파족의 생활상과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네팔에서 거주하고 있다.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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