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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해외원정ㅣ코리안웨이 인도 원정대] 히말라야 등반은 카르마와 아트만을 깨닫는 과정

글·사진 김창호 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등산교육원 교수
  • 입력 2017.08.0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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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수라와 팝수라 2개 봉에 알파인스타일로 고난도 신 루트 개척

다람수라 북서벽을 오르는 필자. 등반루트는 등반자의 머리 위로 직등해 11시 방향으로 층이 진 라인으로 연결된다.
다람수라 북서벽을 오르는 필자. 등반루트는 등반자의 머리 위로 직등해 11시 방향으로 층이 진 라인으로 연결된다.

신과 인간, 그리고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곳, 코리안웨이 원정대가 두 번째 목표로 삼은 히말라야 영역은 바로 인도였다. 이곳으로 떠나기 전 훈련을 하면서 나는 <마누법전>과 <라마야나>, <우파니샤드>를 다시 읽었고, 대원들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피터 홉커크의 <그레이트 게임>을 읽어야 했다. 산을 오르는 등반기술을 익히고 연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와 사람을 먼저 들여다보고 이해함이 원정활동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제2차 코리안웨이 인도 원정대는 2016년 5월에 전국 공개모집을 통해 5명의 원정대원이 확정됐으나, 가을시즌 강가푸르나 원정을 다녀온 후 김창호, 안치영(한국산악회·40), 이재훈(부경대산악부·24)을 제외한 두 명의 재학생 대원이 취업과 부모님의 반대로 자진 탈퇴해서 다시 지원과 추천을 통해 김기현(서울대 문리대산악회·31)과 구교정(경북대학교 산악부·25)이 선발되어 원정대를 재조직했다.

이번 원정은, 경험자 3명으로 조직된 작년 원정대와 달리 원정대를 경험자와 비경험자, 즉 미래를 이끌어 갈 청소년 산악인을 양성한다는 이상적인 모델로 잡고 구성했다. 그러나 이상은 언제나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히말라야 등반은 적어도 10여 년을 다녀봐야 자립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막 걸음마 뗀 대원들을 새로운 루트에 붙여서 그들의 능력이 발휘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가 가야 할 히말라야 거벽은 한국 산의 환경과, 또 대원들이 지금까지 배워 온 등산 교육과 암빙설벽 등반과는 다르고, 젊은 대원들의 등반 기술과 체력은 요세미티식 등급으로 5.13 이상, 판대 100m 빙벽을 남들 앞에서 폼 나게 오르는지에 너무 매몰된 상태로는 우리 원정대에는 충족치 못했다.

팝수라 남벽(우측벽)으로 접근하는 원정대.
팝수라 남벽(우측벽)으로 접근하는 원정대.
팝수라 중상단부의 역층이 진 바위구간 등반.
팝수라 중상단부의 역층이 진 바위구간 등반.
등산의 기본은 걷는 것이요, 궁극의 도달점도 잘 걷는 것이다. 걷기와 오름의 즐거움, 들숨과 날숨의 호흡,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경외감, 가보지 않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 환경변화에 따른 자신의 몸관리 능력이 먼저다. 바꿔야 했다. 등반 기술과 방식을 바꾸기에 앞서 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여덟 번의 공식적인 원정훈련을 마치고 KBS 영상촬영팀 2명과 함께 4월 26일 출국했다.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도의 첫 인상은 무질서 속의 질서였다. 줄기차게 눌러대는 버스의 경적소리에 고요한 숲속을 걷고자 찾아왔던 우리는 혼돈 그 자체에 진절머리를 쳤다.

“인도 경찰은 한 달 중에 20일은 나라를 위해서, 나머지 10일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위해서 일하지요.”

가이드가 말하고는 멋쩍은 듯 웃는다.

새벽녘에 들어간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바로 입산허가와 원정 전 브리핑을 위해 델리대학 캠퍼스 옆에 있는 인도산악재단Indian Mountaineering Foundation으로 들어갔다. 고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남녀 청소년들이 40℃의 폭염 속에서 티롤리안브리지를 교육받고 있었다. “우리 인도인들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모험을 여기에 심는다”라는 인도 최초의 여성 수상이었던 인디라 간디의 연설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연 재단은 인도 산악계의 중심이자 자존심이며 입산허가를 관장하는 관서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약된 브리핑 시간은 의미 없이 기다려야 했고-내가 너희들의 상위 계급이고 허가권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나 사용됐을 법한 영국식 영어로 된 문장들로 메워진 많은 서류-무식쟁이는 사회제도와 법의 테두리 밖에 있다-, 관료주의적인 행정 절차-책상에 앉은 사람만을 위한-는 인도에서 식민지 당시의 영국 냄새가 아직도 짙게 배어나왔다.

출국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인도는 네팔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광과 원정등반대에 대한 서비스가 뒤처져 있고 원정활동에 제약을 주는 규제가 많았다. 첫째 일기예보를 받아야 하는 위성통신장비 사용은 불법이며, 둘째 무전기는 등록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절차는 복잡하고 시간이 소요되어 인도 원정대행사가 기 등록 허가된 무전기를 쓰는 게 원정대의 상례이며, 셋째 재단이 운영하는 도서관이자 산악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는 지도는 스케치맵으로 제작된 트레킹 지도뿐이어서 등반에 적합한 지도는 인도 내에서 구할 수 없었다.

인도를 제외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접경 국가들은 1950년대 말경부터 1960년대 초에 당시 외무부 부장이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를 필두로 국경조약을 맺었다. 그렇지 않은 인도-중국 간에는 악사이친 분쟁과 아루나찰 프라데시주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국경분쟁이 일었고, 특히 히말라야산맥의 대부분은 양국 국경선상에 있어 위성통신장비와 상세지도(군사용)를 민간인이 활용하기 어렵다.

팝수라 북서릉으로 하강하는 김기현, 구교정.
팝수라 북서릉으로 하강하는 김기현, 구교정.
고소적응과 훈련등반으로 피크5620m와 피크5484m 를 올랐다.
고소적응과 훈련등반으로 피크5620m와 피크5484m 를 올랐다.

인류의 시조로 알려진 마누가 거처했던 마날리

델리를 떠나 중형버스로 500km를 스무 시간 달려 마날리로 향한다. 마날리까지의 인도의 도로는 4개의 주州를 경유하는데 넘을 때마다 높은 통행세를 지불해야 하고 부가가치세도 한국보다 훨씬 높았다. 원정대에게 배정된 정부연락관 비젠더Vijender Kanwar는 관광경영학을 전공했고 인도산악재단 산하의 4개 국립등산학교 중에 마날리 등산모험스포츠학교Mountaineering & Adventure Sports Manali 과정을 패스하고 현재 심라에서 관광트레킹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엘리트다. 그는 등반이 종료되고 다시 델리에서 디브리핑을 하기까지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직책인데도 베이스캠프의 쓰레기 분리수거는 물론이거니와 대행사의 매끄럽지 못한 일처리를 대신 거들어 주었다.

새벽녘 만디Mandi부터 평원에서 쿨루계곡의 산악지대로 접어들었고, 북쪽으로 베아스강을 따라 오르는 양쪽의 산비탈에는 막 열매를 맺은 사과밭 지천이었다. 하얀 설산 사이의 땅은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풍요로웠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히말라야와 중앙아시아, 티베트의 광범위한 오지를 탐험했던 제정러시아 출신 탐험가·화가·사상가 등 여러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뿜어냈던 니콜라스 로에리치Nicholas Roerich는 인생의 말년에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는 인도 신화에 인류의 시조로 알려진 마누Manu가 거처했던 마날리에서 샴발라Shambhala를 찾은 것일까!

원정대행사의 건물에 있는 숙소에 배낭을 풀고 사장을 만나 준비에 관해 협의했다. 상·하행 캐러밴과 로컬포터 고용, 베이스캠프에 필요한 물품과 식량은 대행사가 준비하고, 베이스 위쪽에서 필요한 물품은 원정대가 모두 준비하기로 했으나 결국 서로 간에 많은 이해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찬드라 사장은 대학교수를 지냈고 대행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였다.

마날리 타운으로 나섰다. 이곳은 유럽 알프스의 샤모니와 닮았다. 인도 현지인에게는 더운 평원의 폭서를 피하는 시원한 하계 휴양지를 제공하고 원정대에게는 등산거점지이다. 이곳에서 장비와 식량을 모두 준비해야 한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닮은 인도 신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올드 마날리의 마누 템플을 견문했다.

마누가 홍수를 피해 히말라야 산으로 대피했고, 홍수가 물러가고 내려 온 땅이 바로 이곳이라 전해진다. 인도의 어느 종교· 종파를 불문하고 그들에게는 성지이다. 숲 속에는 유연하게 깎여 기묘한 모양을 한 바위들이 많은데 이는 홍수의 영향일까, 아니면 빙하 침식작용일까. 홍수에서 마누를 구해 준 뿔 달린 물고기는 간 곳 없고 레스토랑의 식탁에는 무지개 송어 구이가 유명하다.

비 내리는 마날리에서 버스 2대에 대원과 로컬포터들이 나누어 타고 ‘작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카솔Kasol을 지나는데 시골 동네에 유일한 신호등이 있고 독특한 향이 풍겼다. 도로 옆 안내판에 ‘금연, 마약 금지No Smoking, No Drugs’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개발해 대마초에서 이상향을 찾으려는 전 세계 히피와 배낭여행자가 몰려드는 곳이다. 대마는 도로 길가에 지천으로 널렸다. 온천이 있는 마니카란Manikaran에서 신선한 닭고기를 구입하고, 도보 캐러밴의 시작 마을 토쉬Tosh에 도착했다. 포터 수가 부족해 일부 짐을 두고 계곡을 따라 올랐다.

사라움가라 고개(5,020m)를 경유해 팝수라(왼쪽)와 다람수라(오른쪽)를 관찰하며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사라움가라 고개(5,020m)를 경유해 팝수라(왼쪽)와 다람수라(오른쪽)를 관찰하며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다람수라 북서벽 코리안웨이 루트 개념도.
다람수라 북서벽 코리안웨이 루트 개념도.
등정 당일 하산하려면 원천적인 기 발현돼야

예정한 베이스캠프인 쿠타타치Kuta Thach·4,260m까지는 20여 km 거리, 표고차 1,600m를 4일간 운행한다. 가을시즌에는 당나귀와 말을 이용해 짐을 운반할 수 있지만 지금은 겨우내 쌓인 눈이 녹지 않아 그러할 수 없다. 부다반(2,800m) 주위에는 캉라에서 온 바카르왈Bakarwal 종족의 유목민이 양·염소를 치고 있었다.

샤람타치(3,500m) 캠프에서 영상 촬영팀을 위해 준비했던 발전기 이상으로 멀티탭과 각종 배터리를 태우는가 하면, 네팔에서 오기로 한 쿡이 출국 직전 아버지가 사고사하여 오지 못하는 바람에 요리를 해야 하는 주방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팝수라 원정등반을 했던 경험이 있어 고용된 가이드는 캠프지도 헷갈려 했다.

베이스캠프 도착 전 이틀간 눈이 올 터이니 하루 일정으로 줄이면 포터들도 하산하는 데 좋고, 원정대도 베이스 구축이 편하니 포터들과 협상해 보라고 매니저에게 주문했는데 설득하지 못했다. 안타깝다. 결국 샴시타치(3,860m)를 거쳐 폭설이 내리고 3m 가까이 쌓인 눈밭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베이스캠프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은 두 개의 추모동판이었다.

토시빙하 옆에 설치된 베이스캠프 주위의 쿨루산군에는 5,000~6,500m 높이의 침봉들이 시바Shiva 신의 삼지창같이 솟아 있다. 인도 신화에 따르면 히말라야Himavan에게는 아름답고 우아한 두 딸 강가Ganga와 파르바티Parvati가 있었다.

강가 여신에 관해서는 지난번 강가푸르나 등반기에 언급했다. 두 번째 딸 파르바티는 파괴의 신, 시바의 사랑을 구하기 위해 고행을 나서 여름에는 불 속에 앉아서 태양을 바라보고, 겨울에는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밤을 지새웠다. 결국 파르바티는 시바의 부인이 된다. 원정대가 캐러밴을 하며 거슬러 온 강이 바로 파르바티강으로 이곳 모두가 성지이다. 파르바티 여신은 시바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쟁취했다.

델리를 떠나오면서부터 대원들에게 때와 장소에 맞춰 인도 신화, 히말라야 구조론, 고산병, 빙하의 형태와 운행, 히말라야 기후에 따른 등반시즌, 일기 예측방법 등을 가르쳤고 배운 것은 나한테 다시 강의를 하도록 했다. 앞 봉우리들에 가려져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원정대의 사랑, 다람수라(6,446m)와 팝수라(6,451m)를 쟁취하려면 파르바티와 같은 고행과 자신의 신념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히말라야에 길들여지고 알아나가는 길 위에 있다.

베이스캠프부터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지만 원정대는 다람수라-팝수라 주위를 세 번 맴돌며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고산 등반이 처음인 기현, 작년 칸텡그리 원정에서 고소증세로 시달리다 등반을 마쳐야 했던 교정, 중국 쓰촨성 거니엔산에 한 번의 원정 경험이 있는 재훈을 위해서이며 지도와 산명이 정확지 않은 쿨루산군의 답사 목적도 있었다.

고소증세의 기현과 코감기 기운이 있는 치영이를 샴시타치로 1박2일 내려 보내고 남은 3명은 베이스캠프 남서쪽의 피크4826m에 올랐다. 다시 베이스캠프에서 모두 합류하여 서쪽에 솟은 피크5620m와 피크5484m를 올랐다. 등정기록이 없는 봉우리들이다. 앞의 봉우리 정상에 설 때는 화이트아웃에 공기 중으로 전기가 흘렀고 천둥번개가 쳐서 시바 신이 노했나 싶었다. 피부는 따갑게 타는 듯했고 안전벨트에 찬 쇠붙이에서 부~부~ 하는 소리가 났다. 장비를 벗어 배낭에 담은 후 재빨리 하산해 그곳을 벗어났다.

세 번째 탐사는 히말라야산맥의 수계이자 힌두 문화와 티베트 문화가 분리되는 사라움가라고개(5,020m)를 경유해 다람수라-팝수라 봉우리를 정확히 관찰하고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원래 계획은 팝수라를 먼저 등정하고 다람수라를 시도하려던 것인데 계획을 바꿨다. 다람수라의 상단부가 완전한 바위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루트 공략이 어렵게 보였고 그나마 붙어 있는 눈과 얼음이 녹기 전에 등반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팝수라 남벽을 오르는 김기현 뒤로 다람수라 북서벽이 나타났다. 네팔 캉첸중가 산군의 자누(7,710m) 북벽을 닮았다.
팝수라 남벽을 오르는 김기현 뒤로 다람수라 북서벽이 나타났다. 네팔 캉첸중가 산군의 자누(7,710m) 북벽을 닮았다.
스노샤워가 내리는 가운데 상단부 17피치 등반. 다람수라.
스노샤워가 내리는 가운데 상단부 17피치 등반. 다람수라.

지금까지 전혀 시도가 없었던 다람수라 북서벽은 네팔 캉첸중가산군의 자누(7,710m) 북벽을 닮았다. 이 벽에 전혀 시도가 없었다는 사실이 의아스럽게 느껴졌다. 김창호, 안치영, 구교정, 이재훈 4명은 3동의 로프, 2인용 텐트 2동, 경량의 침낭과 반토막짜리 에어매트리스, 캠과 너트, 아이스크루 6개, 스노피켓 등의 장비와 식량을 넣은 각자 14kg 무게의 배낭을 짊어졌다.

등반은 이스트 토쉬빙하를 통해 어프로치해서 첫날 비박지(5,395m)에 도착, 둘째 날 김창호-이재훈, 안치영-구교정 두 조로 나뉘어 바위가 섞인 설빙벽을 빠른 속도로 10피치를 올랐고 가파른 설릉 위에 눈을 깎아서 비박지(6,100m)를 만들었다. 부산의 박정용이 손수 재봉질해서 만들어 준 1.2×2m의 보조 시트가 절벽에서 캠프사이트를 쉽게 만드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북서벽에 스노샤워가 쏟아져 내렸다.

다음날은 성에가 버석거리는 텐트 안에 있었다. 히말라야 등반은 빠른 날씨 변화에 맞춰 계획 변경도 빨라야 한다. 그러나 이제 루트를 바꿀 수도 없고 ABC로 내려갔다가 맑아진 후 다시 올라오면 전체 원정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된다. 진퇴양난이다. 사랑을 구하는 파르바티와 같았다.

뜨거운 물만 마시고 굶었다. 머릿속은 앞으로 맞게 될 수많은 경우의 수를 헤아렸고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괜히 후배들을 데리고 왔나’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이러한 마음도 창조되고 유지되며 파괴되어 소멸한다.

넷째 날도 가스가 끼고 눈이 내리는 가운데 오버행 밑에 왼쪽 사선으로 뻗은 크랙을 올랐다. 오늘은 치영-교정 조가 선등을 하는 날인데 그들에게서 배어나는 기운은 내가 계속 밀고 나가라는 신호로 판단했다. 디에드르 형태의 크랙은 아이스툴을 가지고 오르기에 쉽지 않았고 더욱이 스노샤워가 홀드와 스탠드를 덮어 손으로 쓸어내리며 등반했다. 18번째 피치에서 20여 m 길이로 20cm 너비의 크랙이 뻗어 있었다. 촉스톤에 감은 확보물도 불안했고 만약 여기서 등반이 종료된다면 하강포인트 설치가 불가능했다. 볼팅 세트가 필요했다. 오버행이라 위쪽 상태를 파악할 수도 없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위로 아니면 아래로, 아이스툴에 매달려 고민했다. 이번 피치만 끝내고 보자. 다시 올랐고 대천장 밑에 도착했다. 내리는 눈 사이로 태양의 빛이 스며들어왔고 루트는 대천장의 왼쪽으로 연결되었다. 교정-재훈은 비박지(6,250m)를 깎고 치영이와 나는 2피치를 더 올랐다. 경사가 수그러들었다. 정상부의 바위벽이 보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날 치영은 낙석에 맞아 얼굴이 7mm가량 찢어졌다.

다섯째 날 날씨는 화창하게 개었다. 4피치를 직상해 총 25피치의 등반으로 5월 24일 오전 10시 정상에 섰다. 베이스캠프에 남은 기현이가 정상에 서 있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촬영했다.

남서릉으로 하산루트를 잡아 어두워지기 직전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정상에 선 날 베이스캠프까지 하산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8,000m 14좌 등정을 할 때 故 서성호와 나는 이런 원칙으로 등반했다. 정상에 선 날 베이스캠프까지 하산한다는. 이는 체력과 정신력이 강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자신 안에 내재된 원천적인 기氣가 발현發現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히말라야니스트들이 산에서 돌아와, 누구나 하면 된다는 허위의 희망을 던져 주었다. 이제 불편해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 누구나 되지 않는다. 히말라야 등반은 자신이 여기에 적합한 DNA를 가지고 있는지, 숨겨진 자신의 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또 카르마Karma·業와 아트만Atman·自我을 깨닫는 곳이기도 하다. 강한 훈련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잡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과한 주장일까.

18피치. 계속 오르느냐, 아니면 하강하느냐에 고민했던 디에드르 크랙.
18피치. 계속 오르느냐, 아니면 하강하느냐에 고민했던 디에드르 크랙.
다람수라 정상에 선 구교정, 이재훈, 안치영(왼쪽부터).
다람수라 정상에 선 구교정, 이재훈, 안치영(왼쪽부터).

공동의 목표와 개인의 목표 달성

다람수라 등반 때에는 김기현이 베이스캠프에 남아 등반팀을 지원했다. 팝수라는 이재훈이 지원을 맡았다.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보며 기다리는 기간이 등반보다 더 고통스러운 직책임을 체험케 했다. 후배들도 앞으로 팀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낙석에 맞아 쿨루병원에 다녀 온 치영은 회복을 위해 베이스캠프에 남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원정 대원 모두 비싼 미국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병원비는 많지 않아 실비로 처리했다.

김창호, 김기현, 구교정 3명은 팝수라 남벽 등반을 신나게 즐겼다. 자신의 사랑에 믿음이 왔을 때이다. 시바 신이 아바타를 만들어 파르바티를 시험했을 때,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오로지 시바 신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때였다.

팝수라 루트도 기존 계획을 변경했다. 중앙 스퍼를 올라 왼쪽으로 비스듬히 연결해 남서릉을 통해 정상에 서는 루트는 파기됐다. 중반부에서 바위벽이 역층으로 등반이 까다로워 보였고 만약 루트가 연결되지 않으면 펜듈럼 하강에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나의 선등으로 정상까지 곧장 직등으로 치고 올랐다. 배낭 무게는 10kg 정도 되도록 장비와 식량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5,900m까지는 러닝빌레이를 보며 올랐고 바위 직벽의 네 피치는 오히려 다람수라의 구간 난이도보다 높았다.

상단부 세락 밑의 3일째 비박지(6,000m)에서 자고 6월 3일 정상에 섰다. 기현과 교정의 얼굴은 지친 기색 없이 웃었고 펼쳐진 히말라야를 응시했다. 그리고 북서릉으로 하강했다. 4박5일간의 팝수라 신 루트 등정으로 코리안웨이라는 공동의 목표는 완성되었고 모든 대원이 한 번 이상씩 등정해 개인적인 목표도 이뤘다고 본다.

델리로 되돌아오는 길은 지프 한 대를 빌려 바르바티산군의 잘로리고개Jalori Pass·3,132m를 넘어 펀잡 히말라야와 가르왈 히말라야를 가르며 흐르는 수틀레지 강Sutlej River을 거슬러 올라 칼파Kalpa에서 하루를 머무르며 키나우르Kinnaur산군을 답사했다. 쉼라Shimla를 거쳐 델리에서 원정을 종료했다.

이번 원정을 주관하고 회원들이 베이스캠프까지 방문해 주셨던 부산산악포럼과 서성호기념사업회, 그리고 노스페이스와 대한산악연맹의 후원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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