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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등산시렁] 남자끼리 수다 떨어도 산에서는 어색하지 않다

글·그림 윤성중 기자
  • 입력 2022.06.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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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시인과 산에서 나눈 잡담

불암산 이름 모름 계곡에 서서 감탄 중.
불암산 이름 모름 계곡에 서서 감탄 중.

가끔, 이 세상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사건들에 관해 상상한다. 예를 들면, 나를 정말로 싫어했던 옛날 직장 동료와 단 둘이 한 달 동안 자동차를 타고 미국 횡단을 한다든가. 포장마차에서 혼자 조개탕에 소주 한 병을 다 마신다든가(나는 술을 진짜 못 마신다). 등산을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산에 간다면 어떨까?도 그런 상상 중 하나였다. 마지막 항목은 일어날 수 있겠다 싶었다. 전화기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형, 이번 주 저랑 산에 갈래요?”
“그래 좋아! 언제? 어디?”
“어, 어. 그게 말이죠. 저기.”

예상 못한 승낙!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전화를 받은 사람은 이우성 시인이다. 그는 원래 산을 좋아했을까? 어안이 벙벙해 잠깐 말을 더듬었다. 

“불암산이오! 이번 주 토요일 아침 7시까지 우리 집으로 오세요.”
“그래.” 

전화기를 내려 놨다. 주제를 바꿔야 했다. 산을 싫어하는 사람과의 산행이 아니라 ‘시인’과의 산행으로.

이우성 시인. 그는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여러 패션 잡지 에디터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광고대행사와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love your fail실패를 사랑하라’이라고 쓰여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다. 내가 봤을 때 그는 나보다 실패의 쓴맛을 훨씬 더 많이 봤다.
이우성 시인. 그는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여러 패션 잡지 에디터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광고대행사와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love your fail실패를 사랑하라’이라고 쓰여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다. 내가 봤을 때 그는 나보다 실패의 쓴맛을 훨씬 더 많이 봤다.

시인이 왔다!

이우성 시인과 알고 지낸 지 5년 됐다. 전 직장 선배다. 그는 글을 이상하게 쓰는데 재미있다.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보다 1만 배 정도 더 유명하니까. 인기 작가와 불암산에서 산행을 한다니. 자랑하고 싶었지만 옆에 아무도 없었다. 방에 있는 아내에게만 들릴락말락 외쳤다. “우성이형 온대.” 

아내는 좋아했다. 또 산에 가냐고 타박하는 대신 이렇게 얘기했다. 

“집에 들러서 식사하고 가시라고 해.”

마침내 그가 왔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는 시인이자 사업가다. 광고대행사와 카페를 운영한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 세상에 저렇게 정신 없이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내가 그였다면 벌써 머리가 돌아버려 미친놈이 됐을 거다. 그러니 그가 이른 아침 우리 동네에 나타난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최대한 상냥하게 그를 불암산 입구로 안내했다. 산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감탄했다. 이어서 따발총처럼 말을 쏘아댔다. 

“와, 너 좋은 데 사는구나. 집 뒤에 이런 곳이 있다니. 나도 여기 집 사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싫어하더라고. 여긴 너무 외진 느낌이라나? 봐봐. 산들이 둘러싸고 있잖아. 여긴 마치 지방의 작은 분지 같아. 시내로 나가는 길이 저 길 하나라고. 와 그런데, 너무 좋다. 나는 상계동이 좋아. 정말 좋아. 물론 지금 사는 데도 좋아. 회사하고 가까워. 강남까지 30분 정도 절약되더라고.”

이우성 시인의 옆 모습. 머리에 마른 솔잎을 꽂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이우성 시인의 옆 모습. 머리에 마른 솔잎을 꽂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를 데리고 철쭉동산에 올랐다. 나도 마구 떠들었다. 

“여기 좋죠? 작년에 트레일러닝 하는 사람들이 여기 무진장 많이 왔어요. 가수 션도 오고. 러닝 전도사 안정은씨도 오고요. 지금은 공사를 해서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진 거예요.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여기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고요.”

더 이상 자랑할 게 없어서 그를 데리고 으슥한 산길로 들어갔다. 길 옆에 소파가 있었다. ‘이상하네, 누가 버린 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우성 시인이 말했다. 

“나는 항상 저런 게 궁금해. 저게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밤에 가져다 놓은 걸까? 낮에 버린 걸까? 혼자서 들고 왔을까? 누구랑 같이 와서 옮긴 걸까?”
“그러게요.”

우리는 계속 올라갔다. 오르막이 가팔랐다. 그는 헉헉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우리 어디까지 가는 거야?”
“어디까지 갈까요? 제가 봐둔 ‘비밀’ 스팟은 여기서 30분 정도 더 가야 하고요. 아니면 여기서 5분만 가면 절터가 나오는데, 거기서 김밥 먹고 내려가도 되고요.”
“아무 데나 가자!”

절벽 옆 절터에 도착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바위 위에 음식 같은 게 올려져 있었다. 좀 더 올라가니 무당처럼 차려 입은 어떤 여자 셋이서 동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를 돌아보면서 표정을 살폈다.

“여기서 김밥 먹을까요?”
“여기 우리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다른 데로 가자.”

숲 옆에 버려진 소파. “도대체 이런 건 누가 갖다 놓는 거야?” 이우성은 궁금해 했다.
숲 옆에 버려진 소파. “도대체 이런 건 누가 갖다 놓는 거야?” 이우성은 궁금해 했다.

영양가가 있든 없든

우리는 절터에서 내려왔다.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비밀 스팟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이때까지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힘이 덜 든 탓인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 예전에 불암산에 왔던 적이 있어. 군대 가기 전이었는데, 바위 절벽이 나타나는 거야. 어렸을 때니까 그냥 붙어봤지. ‘등산로 다 필요없다! 저기로 올라가보자! ‘하고선 친구하고 같이 바위에 붙었는데. 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더라고. 붙어보니까 발이 안 떨어져.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 내려왔어요?”
“바위에 등을 대고 돌아누우니까 신기하게 안 미끄러지는 거야. 그렇게 슬글슬금 내려왔지.”

바위에서 굴러 떨어져서 심각하게 다쳤다거나, 누군가 ‘짠’ 나타나서 구해줬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내려왔지”에서 끝났다. 영양가 없는 얘기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아서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약수터를 지나서 ‘비밀 스팟’에 도착했다. 그는 여전히 쌩쌩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는 말을 쉬지 않았다. 해병대 시절 얘기, 해병대에서 축구한 얘기 말고도, “아, 여긴 전에 와봤어.” “여기가 아닌가?” 등등. 우리는 절벽 끝에 서서 경치를 즐겼다. 한동안 그는 조용했다. 상계동과 얽힌 자신의 옛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잠깐 말이 끊어진 것이 어색해서 기자가 인터뷰하는 것처럼 자세를 고친 다음 질문했다.

내가 지정한 ‘비밀 스팟’에서 경치를 만끽하고 있는 이우성. 그는 상계동에서 오래 살았다.
내가 지정한 ‘비밀 스팟’에서 경치를 만끽하고 있는 이우성. 그는 상계동에서 오래 살았다.

“형, 사업을 시작하기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어때요? 누군가가 사업을 하는 건 빠른 속도로 달리는 버스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고 했거든요. 빠르게 달리는 게 겁이 나지만 도중에 절대 멈출 수 없는 그런 기분일까요?” 

그는 “훗” 웃으면서 답했다.

“나도 가끔 연예인들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하긴 하는데, 너무 포괄적이다. 그래도 얘기를 하면, 나는 일단 빠르게 달리는 건 아니고. 느린 기차 정도 될까? 그리고 여기에 타는 승객들은 직원들이잖아. 뭐, 우리 직원들 다 좋아. 내 기차에 오래 타고 있는 손님도 꽤 있고.”

다음으로 자신의 경영 철학을 들려줬는데, 꽤 근사했지만 어떤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할 정도로 멋졌다는 기억만 남았다. 우리는 계속 수다를 떨었다. 영양가가 있든 없든, 뒷담화 앞담화 가리지 않고 떠들었다. 그와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게 거의 처음이었다. 시끄러웠던 모양인지 까마귀가 “까악!” 크게 소리지르면서 날아갔다. 산행할 때 말고 또 언제 이런 식으로 사람과 얘기할 수 있을까? 카페에서? 술집에서? 낚시터에서? 

산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이뤄지는 대화와는 좀 다를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긴 나무가 있고 풀이 있으니까. 개미가 지나다니기도 하고 새들이 머리 위로 휙 날아가니까. 또 바람이 불고 바람이 아래 마을로 뭔가를 쓸어다가 던지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으니까. 분명 이런 것들이 우리를 다른 식으로 건드리는 게 분명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6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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