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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손재식의 사진여행] 풍경으로 뛰어들다

월간산
  • 입력 2006.07.05 16:27
  • 수정 2006.07.0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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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회룡포... 회룡대 정자 아래가 최적 포인트

▲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는 회룡포 전경.
▲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는 회룡포 전경.

한 장의 풍경을 머리 속에 그리며 길을 나선다. 여행은 늘 호기심에서 비롯되지만 그 영역은 아주 멀고도 깊은 곳까지 미친다.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떠나려면 늘 일상과의 단절이 필요했다. 길에 있으면 현실은 곧 잊혀졌고,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가진 것 이상의 용기를 얻은 것도 바로 여행길에서였다. 수없이 반복해온 집 떠나는 일과 사진이 일상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것은 하나의 구원이기도 했다.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떠나는 일은 어찌 보면 낚시질 같다. 목적 없이 떠나는 여행과 달리 무언가 건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리라. 회룡포가 세상에 다 알려진 지금 숨겨진 정경들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인지. 어쨌거나 이번 여행은 필연적으로 날씨 운이 따라야 한다. 6월의 더위는 공기 중의 수증기가 떠날 곳이 없어 황사 낀 날처럼 답답하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최악의 조건을 피할 수 없다.

보이지 않으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의 특성. 시계가 흐린 날의 풍경은 기댈 언덕이 없고, 비를 만나면 사진가들은 우울하다. 그러나 그런 악조건을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보통 이상의 시각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멋진 풍경이란 뒤집어 생각하면 상투적인 것이 되기 쉽다. 개성을 추구하려면 언제나 보여지는 것 이상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래 한 삽 떠놓으면 섬 되고, 또 한 삽에 육지 되는 곳

압구정역을 출발한 지 2시간 남짓. 새로 뚫린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빠르게 점촌을 빠져나가 용궁으로 들어선다. 이곳 사람들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된 회룡포는 용궁면 주변 큰 길마다 친절한 이정표가 붙어 있다. 그래서 길 잃기란 쉽지 않다.

차를 몰아 먼저 찾아간 곳은 회룡포를 이루는 내성천이 세 갈래로 만난다는 삼강(三江). 그곳엔 나루터와 주막이 있다. 2005년 10월까지 이곳에서 70년을 살았다는 유옥연 할머니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가 살던 주막은 빈집이 되었다.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을 주막엔 꼭 연출한 듯한 고무신 한 쪽과 손때 묻은 빗자루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밑엔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룻배 한 척과 논바닥엔 키 낮은 의자가 영화의 소도구처럼 놓여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풍경들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그 단절된 풍경을 이리저리 주워 담는다. 아무 것도 아닌 사물들이건만 나름대로 느낌을 뿜어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20세기 초, 프랑스엔 일생동안 파리를 찍었던 사진가 유제느 아트제가 있었다. 그의 관심은 아무도 마음을 두지 않는 뒷골목 풍경이었다. 대부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시각에 길거리를 서성대며 작업을 했고, 사람을 정면에서 보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의 사진들은 생계수단으로 찍은 자료였으며 수입은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독특한 여운과 공간감이 그의 사진에는 있었다. 그것이 아트제의 세계였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카메라를 통해 대상과 내통했던 은밀한 느낌은 그가 죽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미국의 여류사진가 베레니스 아보트가 아트제의 진가를 뒤늦게 알고 찾아갔으나 그 땐 이미 꺼져가는 등불처럼 죽음을 앞둔 시점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적이기보단 공간적이란 말로 그의 사진을 아우른다. 그러나 그만의 깊은 내면은 감각적인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 존재를 생각해 보는 그런 일들처럼, 삼강 나루에 남은 200년 묵은 회화나무 한 그루와 10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던 마지막 주막이 잠시나마 나그네들의 발걸음을 놓아주지 않는다. 시원한 다리 밑 그늘에서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픈 유혹이 일어난다.

삼강 마을엔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여러 채 있다. 이곳이 부유한 마을이었음을 말해주는 일이다. 그 중 종갓집쯤으로 짐작되는 고택을 들러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이었다. 비어 있는 대궐 같은 집을 보며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라지지 않고 공간을 점유하는 쓸 데 없는 물건들이지만 눈길에 닿는 아무 거라도 찍어두어야 할 것 같은 연민이 함께 일어났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나이든 어른들이 동리를 지키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럴 때는 바람이나 겨눠야 할만큼 카메라를 쥔 손이 허탈하다.

▲ 여섯 가구에 20여 주민이 사는 회룡포 마을.
▲ 여섯 가구에 20여 주민이 사는 회룡포 마을.

다시 발길을 돌려 내성천을 건너 이름도 아름다운 향석리로 향한다. 향석리는 용궁향교가 있는 마을이다. 그냥 이곳을 지나칠까 하다가 빛바랜 기와가 얹힌 항교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누르지 못해 발길을 멈춘다. 주민들은 모두 논밭에 나갔는지 인기척이 없다. 하얗게 센 노부부만이 향교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반가움을 아끼지 않는다. 개망초가 그득하게 핀 담장 너머엔 앵두가 함초롬히 열렸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평상이 놓인 팽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쉰다. 

향석리에서 내성천의 시멘트 다리를 지나면 회룡대까지 2km 남짓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가면 유서 깊은 도량 장안사가 있다. 높직한 담벼락이 쉽사리 사람을 끄는 분위기가 아니지만, 이곳에서 고려의 문인 이규보가 머물렀다고 한다.

시간은 오후 2시. 해는 약간 서쪽으로 기운 듯하다. 불과 5분도 안 되어 오늘의 목적지 회룡대로 오른다. 이 시간에 바라보는 회룡포 마을은 부드러운 느낌의 강물과 마을을 감싼 주변 산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산이라면 평면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대로 입체감이 있다. 사실 걸음품에 비해 회룡포의 조망은 너무 쉽게 얻어져서 조금 싱거운 면이 있다.

그러나 산허리의 모래 한 삽을 떠놓으면 섬이 되고 다시 퍼다 놓으면 육지가 된다는 표현대로 회룡포의 정경은 충분히 아름답다. 물이 돌아나간 정도를 비교하자면 안동 하회마을은 버선발과 같고, 회룡포는 금방이라도 똑 떨어질 것 같은 호박 형국이라 한다. 하회마을이나 동강의 사행천보다 경관이 좋다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완성도 높은 풍경사진 한 장에 비유하면 좋을 듯하다.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거리를 두면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곳

‘육지 속의 섬’ 회룡포는 원래 오지 중의 오지였다. 물이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어서 산으로 연결된 길을 막으면 빠져나갈 길 없는 귀양지가 되곤 했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도 바로 그런 곳이었다. 회룡포는 경주김씨가 백 리 밖에 있는 의성에서 건너와 살면서 의성포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회룡포는 5만6천여 평의 땅에 9가구가 살며, 주민은 고작해야 20여 명으로 오히려 주민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섬을 한 바퀴 도는 데는 1시간도 채 안 걸리는 아담하고 편안한 마을이지만, 역시 원활하지 못한 교통조건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군에서는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이름을 바꾸고 민박시설을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룡포를 조망하는 곳으로만 여기는 것 같다.

▲ 영화의 소도구처럼 놓여진 키 낮은 의자.
▲ 영화의 소도구처럼 놓여진 키 낮은 의자.

회룡포를 보는 방법이 하나라면 회룡포로 가는 길 역시 하나다. 산허리가 끝나는 곳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임도가 있지만 나그네들이 쉽사리 갈 길이 아니다. 회룡대를 내려와서 되돌아가면 차 한 대 조심스럽게 건널 수 있는 시멘트 다리가 나온다. 그곳을 건너야 다시 회룡포 마을로 갈 수 있다.

내성천엔 정강이를 넘지 않는 야트막한 물이 흐른다. 백로가 유유히 날아다니는 그곳에 어디서 왔는지 70cm는 됨직한 거대한 잉어 한 마리가 물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길 가던 아줌마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쳤고 일행들은 깜짝 놀라 차를 세웠다. 생각할 틈도 없이 일행 중 한사람이 풀쩍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잉어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유유히 강어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일행들의 흥분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길은 강변에서 끊겼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 신발을 벗고 물 속에 발을 담갔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성천을 거슬러올라 오늘의 종착지 회룡포 마을에 드디어 입성한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이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회룡포는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거리를 두면 나타나는 신기루와 같은 곳이었다. 한 점 풍경으로 생각했던 회룡포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저 동심처럼 흐르고 있을 뿐이다.


# 회룡포 촬영 가이드

▲ 수채화 같이 부드럽고 연한 빛깔을 띠는 6월의 내성천.
▲ 수채화 같이 부드럽고 연한 빛깔을 띠는 6월의 내성천.
시기와 시간
회룡포는 단 한 장의 풍경이다. 촬영은 하늘이 맑은 10월과 대기가 흐려지기 전인 5월이 좋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온 다음날은 황톳빛 강물이 흐르므로 좋지 않다. 촬영 시간은 굳이 새벽이 아니어도 좋다. 정오 광선을 피하면 해가 뜬 이후인 아침 7시경부터 오후까지도 촬영 타이밍이 주어진다.

포인트
회룡포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려면 촬영 포인트는 단 한 군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궁면 소재지에서 승용차로 장안사까지 진입하여 그곳에서 약 5분 정도 계단을 오르면 회룡대다. 그곳에서 서면 바로 회룡포가 한눈에 조망된다. 그런데 회룡대 정자에선 소나무 가지가 걸리기 때문에 정자 아래서야 걸림 없는 촬영이 가능하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올라 설 수 있는 돌출된 바위에 서면 일망무제의 풍경이 열린다.  

장비
35mm 카메라 기준으로 최소한 28mm 광각렌즈가 필요하다. 보통 20mm 전후의 렌즈여야 회룡포 전체의 모습과 주변까지 풍경으로 잡힌다.

가는 길(승용차 기준)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여주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갈아탄 후 점촌 나들목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점촌에서 예천으로 향하는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용궁면에 이르면 회룡포로 가는 안내판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면소재지에서 안내에 따라 장안사의 회룡대로 쉽게 갈 수 있다. 용궁면 소재지에서 장안사까지는 5km가 채 안 되는 거리다.

*‘손재식의 사진여행’을 시작합니다. 우리 국토의 산하를 영상에 담기 위해 떠나는 여행에 동참을 원하는 사람은 이메일로 문의 바랍니다.
이메일 주소 alpine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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