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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손재식의 사진여행] 선택과 집중, 그리고 뜨거운 열정

월간산
  • 입력 2006.09.05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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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궁남지 연꽃 촬영

뭉게구름이 피어오를 때면 이글거리는 폭염을 뚫고 강과 바다로 달려가던 추억이 있다. 햇살이 뜨거워도 좋았고, 가는 곳이 멀수록 가슴이 설레던…. 그러나 어른이 되어 갈수록 그 일은 쉽지 않았다. 카메라를 손에 쥐고 나서 세상일이 한 장의 사진에 존재하도록 감성을 세워야했을 때 그 일은 더 어려워졌다. 때가 오면 도연명의 빈 마음이 되어 왔던 곳을 되돌아가면 좋을 것이란 타협적 공상을 해보지만. 그래도 카메라 메고 산에 오르고 자연에 가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을 듯하다. 

여행의 느낌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그윽한 아침 풍경도 한낮이 되면 밋밋해지고, 겨울의 삭막한 정경이 여름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같은 장소라도 계절마다 시시각각 다르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곳으로의 동경은 늘 여행의 동기를 부여한다. 떠나 보면 사는 곳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떠돌다가도 기꺼이 돌아올 수 있을 테니.

▲ 바람에 꽃잎이 떨어져 가고 있는 홍련.
▲ 바람에 꽃잎이 떨어져 가고 있는 홍련.

‘백제는 망했지만, 예술은 남아 있다’

햇살이 몹시 뜨거운 날 백제의 고도 부여로 간다. 장마가 끝났지만 수해로 전국이 떠들썩하다. 그러나 충청도 지방의 피해는 비교적 적었다. 난개발로 인한 재해가 많았으니 개발이 느렸던 충청 지역이 건재한 것은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금강이 흐르는 부여는 고층 아파트가 눈에 띄지 않았고, 자동차가 적은 대신 길을 걷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부산스럽지 않았다.

누구나 하는 것처럼 부여를 방문했을 때 부소산을 먼저 찾았었다. 거기서 의자왕과 삼천 궁녀가 백마강으로 떨어졌다는 바위에 올랐으나 그저 무덤덤하게 내려왔다. 전설은 역시 전설일 뿐이었다. 그런데 정림사 5층탑만큼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본 기억이 있다. 별처럼 절이 퍼져 있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는 경주에 비한다면 부여의 유물들은 사라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폐사터가 주는 허무의 페이소스가 정림사 탑엔 없었다. 기계로 만들어낸 조형물에서 느낄 수 없는 비례와 정교함, 그리고 균형과 절제에서 오는 평온한 느낌이 그 탑에 남아 있었다. 백제는 망했지만 예술은 남아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를 그 오래 된 탑이 말해주고 있었다. 
▲ 시골의 여름 분위기를 연출하는 궁남지.
▲ 시골의 여름 분위기를 연출하는 궁남지.

옛 기억을 되새겨 중앙로에서 남쪽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10분이 채 못 되어 궁남지에 도달했다. 백제의 별궁이었던 궁남지와 정림사터는 그렇게 이웃해 있었다. 궁남지는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궁남지를 보고 경주에 안압지를 조성했으며, 일본도 백제의 조경 기술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다. 그런 근거로 궁남지는 현재까지 정원 조경의 원류가 되고 있다. 원래는 외침에 대한 방어 목적으로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 조성했는데, 삼국시대 연못 조형의 백미로 꼽히니 백제인의 예술 감각은 역시 탁월한 데가 있다.

궁남지의 연꽃은 홍련과 백련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노랑어리연꽃과 가시연꽃도 있으며, 부레옥잠과 개구리밥이 있는 늪지와 원추리, 부처꽃 등의 야생화 단지도 어울려 있다. 국내에서 자라는 식물 중 가장 잎이 큰 가시연꽃은 지름이 큰 것은 2m에 달한다. 멸종위기에 처한 보호식물이었는데, 최근 다시 자생지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백제의 별궁이었던 궁남지에는 서동(백제 무왕)과 선화 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마를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서동은 왕실의 밀명을 받고 신라의 국정을 탐지하러 서라벌로 잠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 공주와 눈이 맞았다. 그러나 국적과 신분의 차이 때문에 선화 공주와 맺어질 수 없었다.

서동은 그 때 거짓소문을 담은 서동요를 지어서 퍼뜨린다는 생각을 해낸다. 서동요는 선화 공주가 남몰래 시집가서 밤마다 서동 도련님을 안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들 입을 통해 삽시간에 서동요가 장안에 퍼지자, 급기야 왕도 어쩔 수 없이 애지중지하던 선화 공주를 귀양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 공주를 데려와서 살림을 차렸는데, 그곳이 바로 궁남지터였다.

 

먹구름이 사라지고 작렬하는 햇볕에 긴장을 풀어버린 궁남지의 연꽃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피어올랐다. 그 넓은 연잎에서 여유롭고 귀한 느낌이 났다. 연꽃을 들어 이심전심을 표현했던 부처님과 가섭의 일화가 아니어도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희고 붉은 연꽃은 다분히 불교적이다.

아름답고 귀한 만큼 연꽃 한 송이를 제대로 찍는 일은 쉽지 않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숨을 멈출 때는 흘러내리는 땀을 막을 방법이 없다. 미동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한 삼각대, 그리고 105mm 마크로렌즈와 80~200mm 줌렌즈가 묵직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장비들이다. 그런데 수고스러운 만큼 파인더에서 느껴지는 시각적 감흥도 깊다.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꽃술 안으로 렌즈를 들이대고 오묘한 형태를 찾아내는 것도 연꽃 사진을 찍는 재미의 하나다.

▲ 쌍둥이처럼 피어난 수련
▲ 쌍둥이처럼 피어난 수련

심도를 얕게 하여 주제를 부각시킨다

더위에 수분을 뺏기지 않으려는 꽃들은 잎을 닫아버렸으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간간히 바람이 불어왔다. 활짝 벌어진 꽃잎들이 흔들렸다. 너울거리는 연잎의 모습에서 ‘수련 채취’라는 에머슨(Peter Henry Emerson·1856-1936)의 옛날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에머슨은 사진사에 기록할 만한 걸작들을 많이 남긴 사람이다. 그는 인공이나 합성보다 자연에서 주제를 구할 것을 주장했다. 에머슨의 사진은 꾸밈없이 정직했고, 사실을 중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에머슨은 그러나 자신의 책자 <자연주의 사진의 죽음(The Death of Naturalistic Photography)>을 통해 이전의 생각들을 철회하고 만다. 그에게 사진은 재현보다 합치와 등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미지간의 상호관계가 새로운 관심사였다. 에머슨은 사진적 현실성을 발견하고 회화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진으로 끌어들였다. 그로써 사진에서 모더니즘의 문을 열어놓았다. 풍경사진가들이 선예함을 추구한 것과 대조적으로 에머슨은 피사계 심도를 얕게 하여 주제를 부각시켰다. 백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오늘까지 불변하는 테크닉이다.
▲ 하트 모양을 만든 가시연꽃. 아직 꽃이 피기 전이다.
▲ 하트 모양을 만든 가시연꽃. 아직 꽃이 피기 전이다.

궁남지의 연꽃을 찍는 방법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디지털에 의해 세상이 가볍고 편하게 변화해도 한 치의 연꽃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아날로그 방식의 노동과 땀이 필요하다. 궁남지 연꽃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선택과 집중이며 여름날의 뜨거운 열정이다.


#궁남지 연꽃 촬영 가이드… 105, 180mm 마크로 렌즈가 유용

연꽃 촬영에서 필요한 사항은 먼저 개화시간을 맞추는 일이다. 보통 해가 뜨는 오전 10시가 넘어가면 봉오리가 닫히기 때문에 오전 또는 햇살이 선선해지는 저녁 무렵이 좋다. 또한 완전한 모양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독특한 모양과 분위기를 지닌 꽃과 분위기를 발견하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무더위 속에서 연꽃 사진 찍기는 생각보다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기 전에 삼각대와 망원렌즈 등 무거운 장비를 메고 발품 파는 것이 필수다. 렌즈는 광각계열에서 105mm와 180mm 마크로 렌즈가 유용하다.

가는길(승용차 기준)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탄천 나들목에서 부여읍내로 들어선다. 부소산성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궁남지 이정표가 있다. 궁남지는 정림사지 삼층석탑과 근거리에 있다.

글·사진= 손재식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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