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손재식의 사진여행] 너무 정직한 묘사는 정원 식물 같다

월간산
  • 입력 2006.10.20 16:52
  • 수정 2006.10.23 11: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창 선운사 꽃무릇 촬영

흥에 겨웠던 여름은 분명 사라진 듯싶다. 벌써 호주머니 속의 따뜻함이 좋아지는 아침이다. 하늘은 단풍 고운 산을 떠올려보기에 좋지만, 그러나 땅의 기운은 아직 민감하다. 이맘때 선운사 골짜기에는 꽃잔치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벌어지는 꽃무릇 향연이다.

남도의 산사 함평 용천사와 영광 불갑사 등에서도 동시에 꽃잔치가 열린다. 붉은 꽃술이 왕관처럼 퍼지는 꽃무릇은 오랜 동안 계절에 가려져 왔다. 꼭 이 때의 환경을 택하여 피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여름과 가을 사이의 계절이 있다면, 선운사에서 굳이 동백만을 노래하지 않았으리.

‘선운사 골째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 /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 막걸리 집 여자의 / 육자배기 가락에 /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꽃무릇은 해마다 9월 중순쯤 선운사 경내 곳곳에 피어난다.
▲ 꽃무릇은 해마다 9월 중순쯤 선운사 경내 곳곳에 피어난다.

미당 서정주가 남긴 ‘선운사 동구’라는 명시는 혹시 그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고향의 향수에 젖어보도록 충동질한다. 그래서 그곳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질박한 남도의 정서를 조금은 나눠 이해하게 한다. 만일 그가 꽃무릇을 보고 시를 지었다면 선운사는 9월에 한 번 더 가야할 곳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와는 달라도 고운 시어들은 하나 같이 선운사에 피어나는 꽃을 노래하고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번 생각할 / 틈 없이 / 아주 잠깐이더군 / 그대가 처음 /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 잊는 것 또한 그렇게 / 순간이면 좋겠네 / 멀리서 웃는 그대여 / 산 넘어 가는 그대여 / 꽃이 지는 건 쉬워도 / 잊는 건 한참이더군 / 영영 한참이더군.’ - 최영미 (선운사에서)

▲ 왕관처럼 기품 있는 꽃무릇.
▲ 왕관처럼 기품 있는 꽃무릇.

화려하고 기품 있지만, 볼만한 사진은 수월찮아


겸손한 마음이란 꽃말의 동백과는 달리 슬픈 추억이란 꽃말을 꽃무릇은 지니고 있다. 선운사에 찾아온 여인이 스님을 연모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어간 후 꽃으로 피어났다는 전설이 이 꽃에 얽혀 있다.

이른봄에 녹색 잎이 나와 여름에 시들어버린 후 9월이 되어서야 땅에서 솟은 꽃대에 꽃이 피므로 풀잎과 꽃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상사화로 부르게 된 연유다.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도 안 되는, 그래서 상사화는 은연중에 속세와 인연을 끊는 절연(絶緣)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 꽃불이 켜진 듯한 꽃무릇 군락.
▲ 꽃불이 켜진 듯한 꽃무릇 군락.

수선화과에 속하는 꽃무릇은 석산화(石蒜花), 백양화, 개상사화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꽃무릇은 7~8월에 연보랏빛 또는 연분홍빛 꽃이 피는 상사화와는 엄격히 구별된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 꽃무릇과 상사화는 공통점을 가진다. 또한 꽃대만 보더라도 이 두 가지는 같은 종이라는 느낌을 금방 알 수 있다. 꽃 색과 모양이 다를 뿐 비슷한 키에 분위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꽃무릇은 독초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비늘줄기(인경)와 잎은 가공하여 약재로도 쓰이지만, 먹게 되면 복통, 구토, 어지럼증 등이 일어나거나 심한 경우에는 혀가 구부러지기도 한다.

▲ 형광빛을 띠는 꽃무릇은 군락을 이룰 때 더욱 환상적이다.
▲ 형광빛을 띠는 꽃무릇은 군락을 이룰 때 더욱 환상적이다.
이렇듯 꽃무릇은 보기와 성질이 다르지만, 모양은 화려하고 기품이 있다. 그래서 사진 찍기 좋은 대상이 된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한 송이로는 풍경이 어렵지만 군락을 지어 피는 꽃무릇은 사진가들에게 반가운 피사체다. 그러나 현장의 느낌과 결과가 생각보다 다른 것도 사실이다.

꽃무릇이 군락을 이룰 때는 눈을 현혹시킬 만큼 아름답지만, 볼만한 사진을 만들기엔 그리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대는 길고 꽃과의 비례가 맞지 않아 근접촬영도 애매하다. 근접하려면 꽃이 크고 거리를 두게 되면 배경을 분리시키기 힘든 구조 또한 그렇다. 그래서 한 송이 또는 몇 송이만을 찍을 땐 망원렌즈를 사용하여 배경을 분리하든가, 목적에 맞는 꽃을 찾아내든가 하는 현장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꽃무릇이 군락을 이루면 형광물질을 발하듯 환상적 분위기가 난다. 이때는 밝은 느낌보다 약간 노출을 떨어뜨려도 관계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플래시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어두운 밤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도 좋다. 너무 정직하게 묘사하는 것은 정원에 가꾼 식물을 찍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무게감이 있는 나무와 조화시키거나 사람과 대비하여 스케일을 나타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꽃만 가득하면 오히려 단조로운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도 까다로운 이 꽃은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환경을 찾아 은밀하게 피어난다. 그리고 추석 때가 되면 이미 지기 시작한다. 시간을 맞춘다면 선운사 주변 계곡 어디에서도 꽃무릇을 볼 수 있다. 동학교도들의 비기를 품고 있었다는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 도솔암으로 가기도 전에 이미 발길에 걸리는 꽃들은 셀 수도 없다. 굳이 그곳까지 오르지 않아도 30여 분 걸음에 꽃길의 정취를 흠씬 느낄 수 있다.

▲ 낮고 편안하지만 신선이 모이는 형상의 깊은 느낌이 나는 선운산.
▲ 낮고 편안하지만 신선이 모이는 형상의 깊은 느낌이 나는 선운산.

그러나 만개를 본다는 것은 여전히 특별한 경험이 틀림없다. 그것 말고도 선운사에는 봐야할 수많은 보물들과 아름다움이 함축된 문화재가 많다. 그리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봄에 가야할 곳으로 여겼던 선운사는 꽃무릇을 찾아 초가을에 가야할 곳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운사 꽃무릇 촬영가이드

선운사는 보통 봄철에 가야 좋을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9월에 피는 꽃무릇으로 인해 가을에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꽃무릇 촬영에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은 정확한 만개시기를 맞추는 일이다. 대체로 9월 중순에서 10월 초순까지 약 2주간에 걸쳐 군락을 지어 피어나며, 그때가 지나면 촬영 대상으로는 적합지 않다.

고창 군청(http://www.gochang.go.kr/)이나 선운사(http://www.seonunsa.org/)에 문의하면 좋은 시기를 알 수 있다. 대개의 풍경 촬영이 그렇듯이  날씨와 만개시기, 그리고 좋은 포인트의 삼박자가 맞아야 꽃무릇을 잘 찍을 수 있다. 어느 때는 도솔천 주변이 좋은가 하면, 또 어느 때는 선운사 입구가 좋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시 자기만의 포인트를 찾아내는 일이다. 꽃이 만개하면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꽃이 훼손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부지런히 포인트를 찾아 찍어야 한다. 시간대는 너무 이르지 않아도 무방하며, 날씨는 꼭 쨍한 날이 아니어도 좋다. 꽃이 거의 그늘에 있기 때문이다.

삼각대는 꼭 필요하다. 또한 플래시를 적정하게 사용하여 부분을 강조하거나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렌즈는 광각렌즈와 접사렌즈, 그리고 망원렌즈까지 다양하게 필요하다. 꽃무릇이 피는 선운사 주변은 이동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아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달고 삼각대에 부착하여 메고 다녀도 좋다.

#선운사 가는 길(서울에서 승용차 기준)

과거에는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했으나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가 더 가깝다. 선운산 나들목을 빠져나와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부안면 소재지를 거친 후 20분 정도 직진하여 선운사 표지판을 따라 가면 된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갈 때는 정읍 나들목에서 빠져나온다. 그곳에서 정읍 시내 반대편으로 진입하여 1.8km를 가면 22번 국도와 29번 국도 갈림길인 주천 삼거리다. 그곳에서 22번 국도를 타고 흥덕(22번, 23번 국도 갈림길), 오산저수지, 반암리 갈림길을 거쳐 오른쪽으로 2.8km 지점에서 왼편으로 선운산 도립공원 진입로를 따라 가면 된다.

글·사진= 손재식 사진가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